‘교회 정치’(Church politics)와 ‘국가 정치’(National politics)

종교문제와 국가의 통치행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많은 경우 ‘정교분리’(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의 원칙을 채택하고 있다. 중세 로마 가톨릭의 제국적인 종교 우위의 폐단과 종교개혁의 시대를 거치면서 로마 가톨릭의 국가교회적인 틀에서 벗어나 오히려 국가의 통치에 우위를 두는 ‘에라스투스 주의’(erastianism)의 반대 극단에 치우치는 이해(예: 재세례파의 철저한 정교분리원칙)를 거쳐서, 계몽사상을 바탕으로 인본주의의 분위기를 바탕으로 하는 현대의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종교와 국가의 정치는 각각 별개의 영역으로 양립하도록 이해하는 것이 보편적으로 된 것이다. 특히나 일부 이슬람 국가들에서 종종 발생하곤 하는 인종청소(ethnic cleansing)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종교적인 입장들과 관점에 따른 판단은 차치하고 국가 자체가 특정 종교를 전적으로 지지하게 될 때에 발생할 수 있는 폐단을 보완하기 위해서라도 영역주권적인 정교분리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평화적인 방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러나 인류의 문명과 문화에 있어서 종교가 전혀 배제되었던 적이 없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종교(혹은 신앙)의 영역은 국가의 통치행위와 관련한 영역과 전혀 별개로 양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종교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국가의 경우처럼 국가의 통치행위에 의해 종교가 철저히 배제되고 억압되는 식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에는 국가에 의해 종교의 영역이 강제될 수 있는가 하면, 각 종교들 안에서 발생하는 분쟁들을 행정적으로나 실정법상 강제력에 의해 실질적으로 처리 혹은 중제하기 위해서라도 국가의 통치행위가 그 역할과 작용을 잘 수행해야만 하는 것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는 것이다. 즉 영역주권은 서로 배타적인 위치를 점유하는 것이 아니라 부득이 중첩되는 영역을 통해 협력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영역은 피조세계 전체를 아우른다”

사실 우리 한국사회를 보더라도, 종교와 국가 사이의 관계는 결코 별개로 양립하는 형태로 있지 않았다. 기독교보다 훨씬 오래도록 자리하고 있던 불교의 경우에도 그렇고, 백년을 조금 넘은 정도의 선교역사를 바탕으로 한 기독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국가와 전혀 별개로 양립해 있는 경우는 실제적으로는 없었다. 조선에 들어온 서양 선교사들이 타고 들어온 배가 군대를 배경으로 하여 들어왔던 것처럼, 이후로도 국가와 기독교는 끊임없는 협조와 협력의 관계설정을 바탕으로 비로소 자리를 잡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동안 누려왔던 종교인 면세의 특혜는 바로 그러한 협조와 지원의 가장 대표적인 예일 것이며, 적산가옥을 불하한 미군정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의 맥락이라 할 것이다.

그런 가운데 얼마 전 예장 합동교단의 한 대형교회의 담임목사의 자격 적법성과 관련한 법원의 판결을 둘러싸고 정교분리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하는 비판이 기독교 안에서 제기된바 있다. 특별히 그 판결의 대상이 종교인(목회자)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한 판결은 교회의 치리회가 감당해야 할 영역을 침해하는 월권적인 것이라고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한국의 기독교를 대표해 왔었던 한 연합단체의 대표가 특정 정치인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면서, 정치권에 기독교 정당을 진입시키려는 움직임을 강력하게 시도하고 있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정부의 정책들에 대한 공공연한 반대와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를 기독교 단체나 심지어 지교회가 공적으로 표명하기까지 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기도 한데, 이러한 기독교 내의 행동들은 기독교 스스로가 국가의 통치행위와 종교의 문제가 결코 신앙과 별개로 양립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라 하겠다.

정부의 정책이나 시책들이 어떤 경우에는 기독교 신앙의 가치관과 영역들에도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 정부의 정책이나 시책에 대한 충분한 의견제시와 수렴을 요구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의견제시와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정상적인 창구 또한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가 행동으로 입증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는 특정한 국가 안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영역이 교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지으신 피조세계 전체를 포함한다는 점에서도 ‘교회정치’(Church politics)와 ‘국가정치’(National politics)를 적절하게 연계하여 이해해야 할 필요가 절실하다.

그런데 장로교회들의 경우에는 이미 그러한 문제에 있어서 가장 명확한 답을 지니고 있다. 로마 가톨릭의 ‘교황정치’나 성공회와 같은 ‘감독정치’와 구별되며, 경건주의 혹은 재세례파의 신앙전통을 기본적으로 이어받은 교파들의 ‘철저한 정교분리의 원칙’과도 구별되는 명확하고 분명한 성경적 제도로서 장로교회 정치 형태의 입장이 이미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다만 한국에 장로교회가 전파된 지 백년이 넘도록 그러한 장로교회정치의 입장이 제대로 이해되거나 정립되지 않고 있을 뿐, 이미 장로교회의 신학과 신앙의 표준인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 안에서도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국가(정부)가 지닌 정당한 권한에 복종하는 것이 신자들의 의무다”

먼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년판) 제23장은 “국가의 관원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특히 3항에서 이르기를 “관원들(Civil magistrates)은 말씀과 성례의 집례, 천국 열쇠의 권세도 자신들의 것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히 5:4절에서 사도는 대제사장에 관하여 언급하는 문맥에서 이르기를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고 했으며, 또 마 16:19절에서 주님은 오직 베드로에게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라는 말씀을 통해 사도권을 부여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제23장 3항은 그렇게만 언급하지 않고, 이어서 언급하기를 “그렇지만 관원은 교회가 일치와 평화를 유지하도록, 하나님의 진리가 순결하고 온전하게 간직되도록, 모든 신성모독과 이단들의 활동을 금하도록, 예배와 권징에 있어 모든 부패와 악습을 방지하거나 개혁하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규례들이 합당하게 서고 시행되며 준수될 수 있도록 적절한 수단들을 강구할 권한을 지니고 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관원들의 의무다.”라고 했다. 이는 수많은 구약성경의 예와 더불어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는 롬 13:1절의 말씀과,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고 한 벧전 2:13-14절 말씀 가운데서 알 수 있는 바이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3장 4항은 “관원들을 위하여서 기도하고, 그들의 인격에 대하여 예우를 갖추며, 공세와 기타 세금을 바치고, 그들의 적법한 명령에 복종하며, 양심에 따라 그들이 지닌 권한에 복종하는 것이 백성들의 의무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사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3장에서 그와 같이 명시하고 있는 것은, 앞선 제4장의 “창조”에 관한 조항 1항에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지혜와 선하심의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태초에, 세상을, 곧 보이는 것(물질적인 세상만물)이나 보이지 않는 것(영적인 세상만물)이나 그 안의 모든 것들을 6일 동안에 창조하시되, 곧 무로부터 창조하시기를 기뻐하셨으며, 모두가 매우 선하였다.”고 한 맥락에서인데, 즉 하나님께서는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간에, 믿음의 세상만이 아니라 불신의 세상에 있어서도 전적인 창조자이시며 다스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맥락으로 웨스트민스터 장로교회 정치 형태에 관한 모범은 서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왕국을 다스리려고, 지금 이후로 영원토록 그 왕국을 공평과 정의로 굳게 세우시려고 다윗의 왕좌 위에, 곧 다윗의 왕국 위에 앉아 계신다.”고 한 것이다. 즉 교회뿐 아니라 세상의 권세 또한 그리스도의 통치권 가운데 있는 것이다.

“교회 정치와 국가 정치는 따로 떨어져 각각 분리될 수 없는 것”

그런데 우리 사회의 기독교 신앙의 국가에 대한 이해를 보면, “관원은 교회가 일치와 평화를 유지하도록, 하나님의 진리가 순결하고 온전하게 간직되도록, 모든 신성모독과 이단들의 활동을 금하도록, 예배와 권징에 있어 모든 부패와 악습을 방지하거나 개혁하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규례들이 합당하게 서고 시행되며 준수될 수 있도록 적절한 수단들을 강구할 권한을 지니고 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관원들의 의무다.”라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언급을 거의 간과하고, 그저 정교분리의 원칙만을 앞세웠다. 그러면서도 정작 “건전한 법령들(wholesome laws)에 따라서, 특히 경건과 공의와 평화를 보존”하려는 바탕에서 시행하려는 명분의 정부 정책들에 대해서도 좌우로 분리된 이념(ideologie)적 기준에 따라 반대를 표명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스스로 정교분리의 원칙을 넘어서는 잘못을 행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반공(Anti communism)에 대한 기독교의 전적인 지지에서 알 수 있듯이 교회와 국가, 교회 정치와 국가 정치는 결코 따로 떨어져 각각 분리될 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임을 우리 스스로 증명해 보인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국가 정치와 교회 정치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는 조금의 관심이나 진전도 없는 채로 기독교 정당 국회 진출이라고 하는 선동이 한국의 기독교 내에 한사코 일고 있으니, 교회 정치와 국가 정치에 관한 최소한의 이해를 결여한 것으로 보이는 그러한 움직임을 현제로서는 결코 긍정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분야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의 성경적인 연구와 역할이 갈수록 절실하게 대두되고 있다. 아울러 그러한 연구와 역할의 부재로 말미암아 이념적으로 대립하는 특정 정권에 편승하는 종교로 오해될 소지의 행동들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먼저 조심스럽게 상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장대선 목사(도서출판 고백과 문답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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