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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나야 할 예수②

최장일 주필 기자   기사승인 2019.08.01  07: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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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과 땅의 만남

성경을 대하면서 거기서 직접 그분 예수 자신과 직접 만나 대화를 하는 경지를 우리는 꿈으로만 그려왔다. 그리고 누가 그런 체험담이나 고백을 해면, 허구적인 얘기로 돌리거나 주관적인 느낌의 고백 정도로 지나치고 말았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상 거대한 빛을 발한 선진(先進)들은 거의 모두가 이런 직접적인 접촉의 체험을 한 사람들이었다. 가령, 사도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어거스틴이나 종교 개혁자 루터와 칼빈, 그리고 웨슬리 역시 예외는 아니다.

실상은 크리스찬들은 모두 이런 예수와의 직접적인 접촉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문제는 무엇이 그리스도와의 참된 만남의 길인가?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께서 주시는 말씀 한 마디가 천지를 울리는 거대한 메시지로 변화해서 자신을 감동시켰다고 하자. 그리고 더욱 깊이 있는 지혜의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면서, 그 깨달음을 인한 감동과 감사의 기쁨에 젖는 경험을 했다고 하자. 그것을 과연 그저 인간의 상상의 불꽃으로 지나쳐 보아야 할까? 만일 그렇다면, 설교자들의 모든 언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한다는 소리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가령, 요한복음 14:4~6에 소개되는 내용을 보자.

도마의 당돌한 힐난(詰難)조의 질문과 그에 대한 그리스도의 몇 마디 응답의 말씀은 몇 단계의 충격을 성경 독자(讀者)에게 일으킨다. 우선 예수께 그런 내용의 질문을 던지는 도마의 태도가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 다음엔 그에 대한 그리스도의 응답 내용과 자세는 더욱 놀라움을 갖게 한다. 그런데 어디 그뿐인가? 정작 여기서 제자들의 냉담한 무감동과 노골적인 스승에의 비난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제자들의 모습은 곧 나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나 자신을 비롯하여, 인간 전반에 대한 비애(悲哀)를 강하게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그러한 우리에게 낙담하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나님께 위탁(委託)하신다. 그렇게 하시고서야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셨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인간 신뢰가 가능하단 말인가?

결국 오순절(五旬節)의 성령강림이 이루어지자, 예수께서 그들을 하나님께 맡기면서 신뢰해 주신 것이 옳았음이 입증되었다. 그것은 도마를 비롯한 제자들이 십자가를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과 감격, 그리고 그로 인한 회개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이 깊은 깨달음과 그로 인한 감격이 무엇인지, 지극히 일부분만 터치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 내용을 대하면서, 도마와 제자들에게 주신 요한복음 14:6의 의미가 이런 부가적 해의(解義)를 담고 있는지 않은지 살펴보기 바란다. 당시 그리스도의 말씀이 지닌 본래의 뜻은 분명히 이런 메시지를 담은 말씀이라고 본다. 이런 정도도 깨닫지 못하고 오순절 다락방 회개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과연 상상력이 있는 한 인간의 생각과 감정의 흐름으로 치부하고 무시할 수 있는가? 예수 제자 도마는 ‘의심쟁이’라는 별명이 붙어있다. 그런데 나는 도마가 이 ‘의심’ 때문에 신앙에 대한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본다.

솔직히 말해 성경은 읽을수록 의문 투성이 많다. 그런 의문을 덮어두고 ‘무조건 믿는다'는 것은 무언가에 홀리는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본다. 만일 신앙이 이런 종류의 믿음을 말한다면, 그것은 영혼을 마비시키는 마약인 셈이다. 왠지 기독교도 ‘아편 같은 최면술’ 같아, 처음 성경을 대할 때엔 교회 나가는 일에 용기를 낼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도마의 솔직 담백한 질문과 그에 선선히 응하시는 예수님 모습을 읽고, 나는 깜짝 놀랐다.

도마의 질문을 요즘 우리 시대의 분위기로 다시 고쳐 읽으면, 이렇게 된다.

"아니, 선생님! 지금 십자가를 지시려는 이유조차 우리로선 이해를 못하고 있는 판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하늘나라 가는 문이 열린다고 하시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게 다 지금 무슨 의미가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갑니다. 우리 이스라엘은 지금 당장 로마 놈들에게 눌려있고, 사이비 종교가들에게 오도(誤導) 당하는 판입니다. 메시아가 오신다면, 어쨌든 이런 우리 처지를 먼저 생각해 주셔야 한다고 보시쟎습니까? .... 그런 우리들이 어떻게 선생님 가시는 곳도 알고, 그 가는 길도 안다고 하신단 말씀입니까? 나, 원 참!"

도마는 이렇게 따지듯 질문했다. 그런데 이에 응하시는 예수님 대답과 그 속에 배인 심정은 나를 감격케 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하시는 말씀은 어찌 보면 꼭 동문서답 같다. '그래, 너 갈 길 가거라, 나는 내 길 간다.'하는 느낌조차 드는 대답이시다.

그러나 바로 그 뒤의 '누구든지 나를 통하지 않으면, 아버지께로 올 자는 없다.'라는 말씀과 결합시켜 놓고 보니,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 심정이 새삼 내게 직접 다가오시는 느낌이었다. 내 가슴에 불이 붙는 듯 했다. 나는 미안함과 감격과 고마움에 사로 잡혀 꿇어 엎드렸다. 엎드린 나에게 마치 그 옛날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도마에게 하시던 주님 음성이 생생히 들려오는 것 같았다.

“네게는 한 백성의 가난과 정치적 억압의 고통이 인간 내면의 타락보다 더 중한 문제로 보이느냐?  그러나 내게는 그 가난과 억압의 원인이 되고, 죽음과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되는 인간의 죄악이 더욱 내 마음을 아프고 아프게 한다. 너는 네 민족의 고통을 인해서는 눈물이 나지만, 억압자들의 미쳐버린 인간성을 인해서는 눈물이 나지 않느냐? 그러나 나로서는 그 비참한 인간성을 인해서도 똑같이 마음이 아프다.

너와 나 사이에서 누가 보다 더 본질적이며 올바른 문제를 포착했다 보느냐? 너는 내가 십자가 대신 칼로 억압자들을 대하기를 바라겠지. 그리고 억압당하는 백성들에게는 우선 정치적 해방을 주고, 굶주림 대신 빵과 칼을 그들 손에 들려주길 바라겠지.

그러나 나는 이들 모두를 내 십자가 아래에 모이게 하여 하나님의 사랑 앞에 함께 무릎 꿇고 감동케 하려 한다. 그리고 각기 자신의 타락한 인간성을 회개하게 한 후, 서로 서로 손을 잡고 빵과 눈물을 나누게 하려 한다. 인간이 원수도 사랑할 수 있음을 알게 하려 한다.

인간을 참으로 위해 주는 처방이라면, 네 처방과 내 처방 중 어느 것이 옳으냐? 도마야, 넌 그래도 내게 이렇게 말하고 싶으리라. ‘선생님, 제발 너무 목표를 높이지 마십시오. 그런 건 선생님 같은 이나 이룰 수 있는 일이지, 결코 인간들에게 이루어질 일은 아닙니다.’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너 자신을 다시 한 번 드려다 보아라. 너는 제법 인간들을 고려해 주어, 목표를 낮추라는 듯하구나. 하지만 그게 정말 네 백성들을 생각해 주어서이냐, 아니면 네 야망과 타산에 억지로 꿰어 맞추려는 것이냐?

이 백성에겐 아가페보다는 빵이 더 급하다는 네 말과 그것은 네 야망을 위한 빵이라는 말 중, 어느 것이 더 옳으냐? 만일 진실로 네가 백성들을 고려했더라면, 네 백성이 잠시 땅에서 굶주리고 있는 것보다 치명적인 영혼의 문둥병이 더 눈에 띄었을 것이다.

그 문둥병이 눈에 띌 만큼 네게 참다운 사랑이 있었다면, 그 문둥병을 고칠 수 있든 없든, 너는 그 문둥병 해결을 위해 네 아버지 하나님께 나와, 내 말을 받아 들였을 것이요, 그러면 너는 내 가는 곳과 그 길을 모른다 하지 않았으리라. 볼지어다. 열려있는 문을 닫혔다 하지 말지니라.

너는 알아야 할지니, 진리는 모르고자 하는 자에게만 가려질 뿐, 그를 찾는 자에게는 늘 열려 있느니라! 도마야, 오늘 이 땅에 많은 종교와 이념과 정치제도가 있다마는, 그것은 거의 모두가 너와 같았거나 그것만도 못한 것들이었다. 너는 그런 상태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하물며 나조차 너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리려 한단 말이냐!

나 이외에 아직도 인간문제를 근원적으로 파헤치고 해결한 예가 없다. 나를 따르라! 지금은 잠시 네가 나를 버려도, 결국 나를 향한 네 사랑이 내 길을 알아보고 따르리라. 내가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이끌리라. 들으라, 내 자녀들아!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

아, 이 얼마나 놀라운 하늘과 땅의 만남인가! 어둠을 일깨우는 노래란 바로 이런 것이리라. 크리스천들의 일상적인 삶은 이러한 예수와의 만남 없이는 신앙을 유지할 수 없다. 다만, 오늘날 이러한 예수와의 만남의 기준이 무엇인지가 불확실하다. 그로 인한 오류와 고의적인 영적 속임수가 많아, 이런 체험 자체를 부정적으로 대하였다. 진리에 대한 이 잘못된 의심과 경계심이 우리를 오도하고 짓눌러 왔다. 이제 여기에서 탈피해야 할 때가 되었다.  

최장일 주필 bonhd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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