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17) 공급(供給)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D.Min.),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위기(危機)라는 한자어를 가지고 위험이 곧 위기라고 말한 자는 누구일까? 한자 문화권의 지도자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미국의 대통령 케네디였다. 위기라는 한자어에는 영어에 없는 위험(crisis)을 뜻하는 위(危)와 기회를 가리키는 기(機)자가 들어 있다.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창업자가 뉴욕에서 임직원들에게 보낸 메시지다. 1년 넘게 해외 출장 중인 그는 이메일에서 “위기는 미소 띤 얼굴로 찾아 온다”, “이럴 때일수록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를 유지하라”, “기회 또한 위기의 모습으로 올 때가 많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빈들에서 제자들은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시간은 날이 저물었다. 사람들은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해 굶주렸다. 그러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는데 필요한 양식을 구하기에는 고을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시간, 공간, 사정을 헤아려볼 때 집회를 중단하게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로 가게 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예수님은 무리를 고을에 보내어 각자 해결하도록 하자는 제자들의 제안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직접 무리들을 먹이라고 명하신다. 제자들이 이 사건에 참석자가 아닌 참가자 또는 참여자로서 역할을 하길 원하신다. 참석, 참가, 참여는 같은 뜻일까. 참석한다는 것은 그냥 자리만 채운다는 뜻이다. 그러나 참가한다 또는 참여한다는 것은 다르다. 올림픽이나 디자인 공모전일 경우에는 참석이라고 하지 않는다. ‘겨루기’ 성격의 행사나 모임에는 참가한다 또는 참여한다고 쓰인다. 제자들은 무리들처럼 참석자가 아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직접 참가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자들이다.

게네사렛의 어느 한적한 곳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인솔한 까닭은 제자들의 휴식과 충전을 위함이었다. 제자들의 전도여행은 결실을 보게 되었다. 남자 오천 명이 예수님께 나아와 하루 종일 말씀 집회를 갖게 된 것이다. 날이 저물어 저녁식사 때가 가까이 오고 있었다. 장소가 ‘빈 들’이기 까닭에 할 수 있으면 집회를 종료하고 청중들을 해산하여 가까운 마을에 가서 끼니를 해결하도록 하도록 집회 중단을 제안하게 되었다. 왜 제자들이 예수님이 말씀 전하시는 것을 멈추고자 했을까? 자신들이 너무 피곤하고 허기졌기에 집회를 빨리 마치도록 종용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설교가 너무 길기에 멈출 것을 요구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무엇이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설교를 멈추도록 제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했을까?

 

1. 제자들의 책임과 한계

각 공관복음서마다 제자들이 설교가 길어지는 예수님께 제안을 한다. 집회를 중단하고 청중들을 고을에 보내어 먹을 것과 잠잘 것을 얻도록 하자는 제안이다(마 14:15; 막 6:36). 열두 사도의 제안은 설득력이 있는가. 아마 설득력이 있었다면 제자단의 건의를 예수님이 수렴했을지 모른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자들의 제안에 문제가 있다. 그 시간에 들판에서 집회를 마치고 남자만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가까운 마을들로 갔다고 해 보자. 과연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고 재울 수 있는 여건이 되는가. 사실상 제자들의 제안은 이야기의 전개를 위한 문학적 제안이다. 또는 책임회피용 발언일 수 있다.

제자들의 건의에 예수님은 이외의 대답을 하신다. Yes와 No가 아니다. 제자들의 제안대로 고을로 흩어지게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알아서 해결하겠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로 말씀하신다(마 14:16; 막 6:37). 제자들이 어렵게 건의를 했을 텐데 자신들을 문제의 중심에 세우신다. 예수님께서 되레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말씀은 행간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은 손을 뗄 터니 너희가 알아서 하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영국의 2파운드짜리 동전 테두리에는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라는 글귀를 떠올리게 한다. 영국이 우리 돈 약 3000원에 맞먹는 이 동전에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서’를 새겨놓았다. 이는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뉴턴과 무관하지 않다. 뉴턴은 주위 사람들이 자신의 물리학적 발견을 치하하자 “내가 남보다 더 잘 보고 더 멀리 봤다면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설 수 있었던 덕분”이라고 말했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이탈리아 철학자 사상가)의 베스트셀러 ‘장미의 이름’에는 이 구절을 인용했다. “우리는 난쟁이지만,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쟁이다. 우리는 작지만, 때로는 거인보다 먼 곳을 내다보기도 한다.” 시간으로 볼 때 날이 이미 저물어 간다. 공간으로 볼 때 빈 들이다. 인원으로 볼 때는 남자의 숫자만 5천이 넘는다. 가진 것은 없다. 사면초가가 따로 없다. 열악한 환경의 압박에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의 해결자이신 예수님의 어깨에 서면 사정이 달라진다. 문제지 뒤에 답이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어깨 위에 서면 답이 보인다.

 

2. 하늘의 공급자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제자들이 명령에 따른 문제를 해결할 대답을 기대하기보다 수사 의문문(rhetorical question)에 가까운 표현을 하고 있다.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너희들이 그들에게 주어 먹도록 하라”이다. ‘너희가’의 사용은 강조 용법으로 제자들의 믿음을 도전하는 명령문이다.

고대 중국에서 재상은 원래 요리사였다. 주나라 재상을 ‘천관총재(天官冢宰)’라 불렀다.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쓸 음식을 마련하는 직책이었다. 한자 ‘주관할 재(宰)’자는 ‘집(宀)’ 아래에 ‘매울 신 또는 고생할 신(辛)’자다. 주방을 맡은 사람이란 뜻이다. 집에서 하늘에 바칠 음식 준비를 고심하며(辛) 주관하는 사람을 재상이라 한다. 왜 고생인가. ‘신(辛)’자는 십자가(十) 위에 서 있기에(立) 고생이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음식을 장만하는 것이 재상이 져야 할 자기 십자가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은 곧 그들에게 재상의 역할, 즉 요리사로서 역할을 요구하시고 있는 것이다. 주방장이신 예수님께 받아 무리들에게 서빙하는, 크게 힘들지 않으면서 중요한 직책이 아닐 수 없다. 생산자가 아닌 공급자를 말한다. 서빙은 포함된다. 자신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을 공급하는 전달로서 너희가 할 일을 하라는 말씀이다.

사람의 특징을 나타내는 용어 중 적성(aptitude)과 태도(attitude)라는 단어가 있다. 둘 다 라틴어인 ‘앱투스(aptus)’에서 기원한다. 일반적으로 업무와 적성이 일치하는 인재는 자신의 업무 영역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어원은 같지만 태도는 사전적으로 개인이 처한 환경에서 상대방에 대한 개인의 인지적, 정서적, 행동적 지향성을 말한다. 제자들은 들판에서 배식은 적성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은 적성이 아니라 태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제자들의 능력과 소질은 한계가 있다. 꺔냥이 안 된다. 깜냥은 우선 ‘지니고 있는 힘’을 뜻한다. 능력 또는 역량의 의미를 품고 있다. 구체적으로 제자들이 5천명을 먹일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능력과 적성보다 마음가짐과 태도는 후천적 노력에 따라 더 쉽게 달라질 수 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한다면 문제가 간단하게 해결된다. 시간, 장소, 인원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을까? 제자들의 믿음을 떠 보기 위함인가? 무리들은 제자들이 전도해서 왔기 때문에 음식을 공급할 책임의식을 갖게 함인가? 무리를 영접한 분은 예수님이다. 그런데 청중들의 먹을거리 걱정은 제자들이 한다. 왜 제자들이 무리들의 저녁식사를 걱정하고 있는가. 제자들이 여러 촌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듣고 따라온 사람들이었기에 책임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이제 그들의 필요를 채워줄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고 사람들로부터 대접을 받았다. 이제 그들은 자기들에게 온 사람들을 맞아서 대접을 베풀 차례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는 자, 즉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자 나아오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나아올 때 그들을 영접하고 섬겨야 책임이 제자들에 있는 것이다. 마치 한 마리 잃어버린 양, 탕자,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았을 때 셋 다 잔치를 베푼다. 양이나 드라크마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을 들여 잔치를 벌인다. 재산을 탕진한 탕자를 생각하면 잔치 비용이 부담이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회개하고 한 영혼이 돌아올 때 하늘의 아버지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고 환영하는가를 환영식사, 즉 잔치를 통해 보여준다.

비록 많은 무리들이 제자들의 전도에 힘입어 광야로 나아왔지만 그들은 제자들을 만나기 위해 온 사람들이 아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성취시킬 그리스도를 전하는 중재자(mediator)요, 대리인(agent)이다. 예수님을 연결하는 자들이다. 제자들이 전도를 했지만 무리들은 자신들의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람들이다. 제자들은 결국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여 먹을 것을 얻게 되고 그것을 자신들로 인해 찾아온 무리들에게 공급하게 된다. 영적 브로커 역할을 하길 원하신다. 부유하신 하늘의 아버지께 받아 지치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전달할 역할을 하는 자들이 제자들의 일이다. 부유하신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공급을 받는 것은 예수님이 친히 하실 것이고 제자들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을 들고 가서 필요에 따라 배분하는 일을 하면 된다. 이것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명령에 대한 대답이다. 예수님 자신도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께 받아 낸 것을 제자들은 백여 명씩 둘려 앉아 있는 그룹에게 배분을 하면 된다. 제자들의 손이 아닌 예수님의 손에서 받아 무리들에게 전달하는 영적 브로커(Broker)들이다. 중재자로서 후원자이신 예수님께 받아 수혜자인 무리들에게 나눠주면 된다. 예수님은 후원자이면서 중재자이다. 제자들은 중재자이면서 수혜자이다. 무리들은 수혜자들이다. 통즉불통(通則不痛), 불통즉통(不通則痛)은 한의학에서 통하는 말이 아니라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 하늘과 땅이 통하게 하는 것이 중재자이신 하나님 아들의 역할이다. 제자들의 반응은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두 손을 놓고 망연자실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공을 맡기는 것이 최선의 과제다. 예수님은 후원자체계에서 하늘의 중재자이면서 후원자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떡과 고기를 받아 수혜자요 고객인 무리들에게 공급하는 중재자요 브로커(Broker)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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