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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기독교국가로 건국된 대한민국(3)

김수경목사 기자   기사승인 2019.08.15  08:58:00 | 조회수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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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독립선언서 및 2·8 독립선언서

이승만은 감옥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한국 최초 신학잡지인 ‘신학월보’(광무7년, 1899년 3월)에 다음과 같이 기재했다.
"이 험한 옥중에서 이 험한 질곡을 겪으며 무사히 부지하여 있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가 아니면 인력으로 못하였을 바이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감화시키시는 힘을 나에게 주시지 아니하였다면 이 일에 도움이 되지 못하였을 것이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으로 세상 죄인들을 감화시키시는 교가 아니면 불소한 재정(財政)으로 서적실을 졸지에 설치할 수 없을지라. 이것이 나의 이른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함이니 이 깨달음과 감사함으로 나날이 힘쓰면 오늘 심는 겨자씨에서 가지가 생겨 공중에 나는 새가 깃들이게 될 줄 믿겠나이다."

도미하기전 이승만 가족 사진 , 첫부인 박씨(오른쪽) 외아들 봉수(모자쓴 아이)와 아버지 경선공. 맏누이(왼쪽)

민영환, 한규설 등의 노력으로 특사를 받아 1904년 한성감옥에서 출옥한 이승만은 29세의 나이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밀지를 갖고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기 위하여 제물포항에서 11월 4일 도미(渡美)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그는 서울에 와있는 선교사들로부터 미국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추천서를 받았다. 선교사들은 이승만이 옥중에서 얼마나 열심히 전도했는지에 대한 것과 그로 인해 그가 앞으로 한국을 기독교 나라로 이끌 인물이라는 평을 해주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추천서

"고난이 유익"이라는 말과 요셉이 감옥에 있을 때 "형통하였다"라는 말씀처럼, 그가 감옥에서 보여준 전도의 열정은 선교사들의 마음을 움직여 귀한 추천서를 쓰게 했고, 그 결과 조지워싱턴대학으로부터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3학년으로 들어가게 되어 대학을 2년 만에 졸업했다. 즉 감옥에 들어갔기에 요셉이 정치를 배우게 되어 총리가 된 것처럼 이승만 역시 감옥에 들어갔기에 대통령이 되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조지워싱턴 대학 교복차림의 이승만

이승만은 1905년 4월 23일 부활절에 미국 워싱턴 D. C.의 커버넌트 장로교회에서 루이스 햄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윌리엄 태프트(William H. Taft) 국무장관의 주선으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다. 그러나 러일전쟁으로 미국은 일본을 지지하는 정책을 하게 되어 이승만의 한국 독립 청원은 실패했다. 그래서 그는 미국에 남아 공부하며 독립운동을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조지워싱턴 대학 졸업장 
프린스턴 대학 졸업장

조지 워싱턴 대학(George Washington Univ.)에서 전액 장학생으로 학사과정을 2년 만에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Harvard Univ.) 인문대학원에 입학한 이승만은 1년 동안에 석사과정을 이수하고, 1910년 7월에 프린스턴 대학(Princeton Univ.)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세계 역사상 5년 동안에 미국의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석사 및 박사 학위까지 받은 최초의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 이름을 남겼다. 그는 공부를 마친 후 1945년까지 독립운동과 집필활동을 하였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

이승만의 첫 부인 박 씨 9살 난 아들 봉수를 박용만과 함께 미국에 보냈으나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나게 되어 이승만의 아버지 이경선은 격노하여 이승만 부부를 이혼하도록 했고 1912년 이승만은 결국 이혼했다. 그 후 박 씨 부인은 6·25 때 이승만의 본처라는 이유로 인민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한국 내에서는 그의 저서 『독립정신(獨立精神)』과 『한국교회 핍박』 등이 압수되고 일제 강점기 동안 판매가 금지되었다. 『독립정신(獨立精神)』은 출판할 수 없어서 필사본으로 된 것을 지인들이 돌려보다가 박용만이 숨겨서 미국에 가져와 1910년에 미국 LA 대동 신서 관에서 『The Spirit of Independence』 첫 출판 본이 나오게 되었다.

『독립정신』출간을 보도한 황성신문 1910년 4월 2일자

한일 강제 병합(韓日 强制 倂合)
韓国併合に関する条約 칸코쿠 헤이고니 칸스루 조야쿠

대한제국은 1910년(경술년) 8월 22일에 조인되고 8월 29일 발효된 `경술국치`가 일본에 의하여 이루어졌는데, 이는 경술년에 국가에 치욕적인 일이 발생했다고 해서 부르는 말이다. `경술국치`(庚戌國恥) 또는 `국권 피탈`(國權被奪)이라 부른다.
`한일합방`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 사용한 말인데, `합방`은 `동등한 자격으로 합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일본은 동등한 자격으로 합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병합`(倂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조약 체결 당시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이라고 했다.
다음은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기록된 1910년의 경술국치에 대한 배경 설명이다.

 

<내용>

1. 을사조약의 체결과 고종의 강제 퇴위

일제는 먼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 대한제국의 내정을 지도 감독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 ‘제2차 한일협약(을사5조약)’을 작성하여 대한제국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조약을 체결할 것을 강요하고 무력으로 궁궐을 포위, 위협하였다. 결국, 1905년 11월 17일 내각의 참정대신(내각수반)이 반대하였으나 5대신의 동의를 받아내는 데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끝까지 이를 비준하지 않고 서명과 옥새 도장도 찍지 않아, 이 을사5조약은 체결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체결되지 않았다. 당시 대한제국은 전제군주제 국가였으므로 전제군주의 승인과 서명날인, 비준은 조약체결의 필수 요건이었다.
그러나 고종이 끝까지 조약비준을 거부하자, 일제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이 서명날인한 조약문을 가지고, 마치 을사5조약이 체결된 것처럼 공포한 다음 이를 무력으로 강제 집행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먼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그 해 1월 17일 대한제국 외부(外部)를 폐지하였으며, 1월 20일에는 대한제국의 외교관·공사·영사제를 모두 폐지하였다. 그리고 그 해 2월 1일 서울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 문을 열었다.
이후 일제 통감부가 중심이 되어 대한제국의 완전 병탄을 위한 공작과 정책이 강행되기에 이른다. 통감부는 즉각 고문경찰제도(顧問警察制度)를 실시하여 한국의 경찰권을 장악하고, 1907년 5월 이완용(李完用) 내각을 수립하여 통감부 밑에 두었다.
그 해 6월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고종은 을사5조약을 황제 자신이 승인하거나 서명날인하여 비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조약 체결은 무효이며, 따라서 일제의 국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는 불법이란 사실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이상설(李相卨)·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 세 특사를 파견하였다.
이것을 트집 잡아 일제는 1907년 7월 19일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고, 황태자 순종을 즉위시켰다. 그리고 5일 후인 7월 24일 일본인 관리를 대한제국 정부의 차관으로 임명하고, 통감부가 내정을 직접 지배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이와 동시에 서둘러 한국을 완전히 빼앗을 목적으로 7월 22일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감옥 사무를 통감부에 이양하게 하였다.
7월 24일에는 언론을 탄압하기 위해 신문지법을, 7월 27일에는 집회·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을 제정하였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무방비 상태에 두기 위해 7월 31일 대한제국 군부(軍部)를 폐지하고, 8월 1일에는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였다.

 1907년 7월 24일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 가운데 영친왕. 그의 뒤 왼쪽이 이완용(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 항일투쟁의 전개

일제의 완전병탄정책이 강행되던 1904년 여름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항일의병무장투쟁은 1907년 8월 1일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급격히 고양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의병운동이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급속히 퍼지자 일제의 한국병탄정책은 심대한 타격을 받고 이에 대응하느라 일정이 지연되었다.
1909년 일제는 완전병탄정책을 다시 강화하기로 하고 이용구(李容九)·송병준(宋秉畯) 등이 속한 일진회로 하여금 한일합방론을 제창토록 교사하였다. 초대 통감 이토(伊藤博文)는 그 해 4월 10일 일본 내각총리 가쓰라(桂太郞), 외무대신 고무라(小村壽太郞) 등과 함께 한국을 완전 식민지로 병탄하기로 합의하였다.
1909년 6월 이토가 통감직을 부통감 소네(曾荒助)에게 인계한 뒤 귀국하여 추밀원 의장직을 맡은 직후인 7월 6일, 일본 내각회의는 비밀리에 한국을 완전 식민지로 병탄하기로 의결하고 즉시 일본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은 그 해 9월부터 2개월간 이른바 남한대토벌을 실시, 한국 의병들의 항전을 종결시킨 뒤 병탄을 마감 지으려고 획책하였다.
그러나 두 개의 큰 사건이 일어나 일제의 계획은 다시 차질을 빚게 되었다. 1909년 10월 26일 한국 병탄에 대한 러시아의 양해를 얻고 만주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극동을 여행 중이던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체프(Kokotseff)와 회담을 하려고 만주 하얼빈에 갔던 이토가, 한국인 의병장 안중근(安重根)에 의해 저격을 당해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뒤이어 그 해 12월 2일 한국의 친일파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애국청년 이재명(李在明)의 습격으로 중상을 당해 집무불능 상태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박제순이 임시내각총리대신서리를 맡았으나 친일내각 구성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일제는 그 해 12월 4일동경(東京)에서 낭인단체인 고쿠류회(黑龍會)가 수상의 지시를 받고 초안을 작성, 수상 가쓰라의 검열을 받은 ‘한일병합에 관한 상주문(上奏文)’과 청원서·성명서를 이토의 장례식에 참석한 일진회 간부에게 주어 서울에서 발표하게 하는 등 한일병합 여론을 조성하려 하였다. 그러나 애국계몽운동파가 총궐기하여 일진회 일당을 격렬하게 성토하고 일제의 의도를 규탄하여 일제의 한국병탄 기도는 다음해로 넘어가게 되었다.

3. 한국병탄 강행

1910년 3월 26일 일제는 안중근을 처형하여 국제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이 사건을 종결지은 다음 서둘러 한국병탄을 강행하였다. 1910년 5월 30일 병약한 소네를 통감에서 퇴임시키고 현역 육군대장으로 육군대신인 데라우치(寺內正毅)를 통감으로 겸직하게 하였다.
또한, 6월 24일 박제순 내각에 강요하여 한국 경찰사무를 완전히 위탁하는 협정을 체결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의 경찰관제는 폐지되고, 통감부가 경무총감부를 설치하여 일반경찰권까지 완전히 장악하였다. 통감부는 헌병경찰제를 채택, 헌병사령관이 경무총장을 겸임하고, 지방의 헌병대장이 각도의 경찰부장을 겸임하게 하며, 헌병경찰수를 대폭 증가시켰다.
그리하여 대한제국 정부에 고용되어 있던 한국인 경찰관 약 3,200명, 일본인 경찰관 약 2,000명, 일본인 헌병 약 2,000명, 한국인 헌병보조원 약 4,000명, 일본군인 2개 사단 등의 무력을 전국 각지에 거미줄같이 배치, 한국인의 어떠한 반항도 탄압할 수 있는 무단 체제를 갖추었다.
7월 23일 서울에 온 제3대 통감 데라우치는 일본 수상으로부터 병합조약 초안의 대강은 물론, 병합 후의 대한 통치방침까지 내명받고, 한국에 온 즉시 한국인의 저항 발언을 봉쇄하기 위해 『대한민보(大韓民報)』 발행을 정지시키고,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판매금지시켰다. 이어서 7월 29일 부상에서 회복된 이완용을 다시 총리대신으로, 박제순은 내부대신으로 하여 이완용 내각을 구성하였다.
8월 16일 데라우치는 이완용과 조중응(趙重應, 농상공부대신)을 통감관저로 불러 이른바 병합조약의 초안을 보여 주고는 수락을 얻어서 비밀리에 의논한 뒤, 8월 18일 이완용 내각의 내각회의에서 합의를 보게 하였다.
드디어 1910년 8월 22일 서울거리에 15간마다 일본 헌병들을 배치해 놓고 순종 앞에서 형식상의 어전회의를 개최, 이른바 한일병합이란 안건을 이완용 내각이 결의하는 형식을 갖추었다.
그 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의 이름으로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이 조인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민의 반항을 두려워하여 조약체결을 숨긴 채, 사회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원로대신들을 연금한 뒤인 8월 29일 이를 반포하였다.

 일본 헌병들

4. 한일병합조약의 내용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의 원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국 황제폐하 및 한국 황제폐하는 양국간에 특수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고려, 상호의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고자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이 선책이라고 확신, 이에 양국간에 병합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해 일본국 황제폐하는 통감 자작 데라우치를, 한국 황제폐하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각기의 전권위원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므로 전권위원은 합동협의하고 다음의 제조를 협정하였다. 

제1조.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전부(全部)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에 기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전연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한다. 
제3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한국 황제폐하·황태자전하 및 그 후비와 후예로 하여금 각기의 지위에 적응하여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하게 하며, 또 이것을 보지(保持)하는 데 충분한 세비(歲費)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 이외의 한국 황족 및 그 후예에 대하여도 각기 상응의 명예 및 대우를 향유하게 하며, 또 이것을 유지함에 필요한 자금을 공여할 것을 약속한다. 
제5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훈공이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히 표창에 적당하다고 인정된 자에 대하여 영작(榮爵)을 수여하고, 또 은금(恩金)을 준다. 
제6조. 일본국 정부는 전기(前記) 병합의 결과로 한국의 시정(施政)을 전적으로 담임하여 해지(該地)에 시행하는 법규를 준수하는 한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충분히 보호해 주며, 또 그들의 전체의 복리증진을 도모할 것이다. 
제7조. 일본국 정부는 성의로써 충실하게 신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을 가진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帝國)의 관리에 등용한다.
제8조. 본 조약은 일본국 황제폐하 및 한국 황제폐하의 재가를 받은 것으로서 공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한다. 이상의 증거로서 양국 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기명(記名)하고 조인(調印)한다.”

융희(隆熙) 4년 8월 22일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
메이지(明治) 43년 8월 22일
통감(統監) 자작(子爵)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데라우치 마사타케

프린스턴 대학에서 국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10년 귀국한 이승만은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학감 겸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성경과 미국 역사 등을 가르치면서 지방에도 YMCA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본 총독부는 그가 독립운동을 한다고 생각하여 그를 비롯한 크리스천 독립운동가들을 잡기 위하여 1912년 ‘105인 사건’을 만들었다. 그 당시 신민회(新民會)와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배일문화운동을 비롯하여 새로운 문화를 통한 독립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필립 로링 질레트

서울 YMCA 필립 L. 질레트(Phillip Loring Gillette. 한국이름: 길례태(吉禮泰)) 총무와 국제 YMCA 존 모트(John Raleigh Mott) 위원장의 도움으로 이승만은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으며, 감리교 선교부의 도움으로 이듬해인 1913년 2월에 미국으로 망명하여 1945년 10월까지 미국에서 활동하였다.
미국에서 이승만은 하와이 호놀룰루(Honolulu)에 정착하여 한인 교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며 교육하는 일에 전념했다. 그는 『태평양잡지』라는 월간지를 창간하여 교포들에게 기독교 정신과 애국심을 고취시켰으며,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하고 그 교회의 이사장 및 선교부장을 담당하면서 목양자의 자세로 교회를 돌보았다. 

 한인기독학원

그리고 ‘한인여자성경학원'을 남녀공학의 ‘한인기독학원’(The Korean Christian Institute)으로 바꾸었고 후에 이 ‘한인기독학원’을 ‘한인중앙학원’으로 개명하고 애국 교육과 선교 활동을 하였다. 또한  『한국교회 핍박』이란 책을 저술하여 '105인 사건'의 실상을 밝혔다.

그는 이렇게 하와이에 정착하여 그곳 한인교포들을 예수를 믿는 애국자들로 만드는 독립운동을 교회와 학교를 세우면서 전개하였다.

한인중앙학원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미국의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대통령은 1월 8일 미국 의회에서 새로운 세계 질서를 세우기 위한 14개 조항(The Fourteen Points)을 발표했는데, 그 중에 패전국들에 대한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와 국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의 필요성을 주창했다. 민족자결주의는 식민지 나라들이 계속해서 식민지로 남을 것인지 독립국으로 해방될 것인지를 결정하라는 것이다.
윌슨 대통령은 이후 1월18일부터 21일까지 파리에서 열린 '파리평화회의'에서 '14개 조항'을 제시하였으나 자신들의 식민지를 빼앗기고 싶지 않은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국들의 반대로 윌슨의 제안은 모든 식민지 국가에 해당되지 못하였다. 
윌슨 대통령은 과거 프린스턴 대학 정치학 교수로 이승만의 박사논문 심사위원이었다. 윌슨 교수의 집에 자주 방문하면서 서로 친분을 쌓았던 이승만은 윌슨이 대통령에 오르자 지속적으로 민족 자결의 의의를 역설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승만는 이미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할 것을 알고 송진우와 김성수 등 국내 민족지도자들에게 알려 해외에서도 한국의 독립을 위한 거사를 하도록 밀서를 보냈다고 전해진다.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1985, 동아일보사)에 담긴 일화 중, 김성수, 송진우, 현상윤이 대규모의 국내 운동을 일으키라는 이승만의 밀서를 받고 조국독립의 정신을 각성, 거국적 독립운동을 준비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승만은 한국이 일본의 통치보다는 국제연맹의 보호를 받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1919년 2월 25일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을 장차 완전한 독립을 보장해 준다는 약속 하에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두고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일본이 승전국이었으며 "파리평화회의"에서 윌슨의 제안이 이미 수정되었기에 이승만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버드대학원 시절 이승만(뒷줄 왼쪽). 정치학 교수 윌슨(앞줄 가운데)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

대한독립선언서는 1919년 2월 1일 만주와 미국 등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이승만을 비롯한 저명인사 39명이 만주 지린(길림 吉林)에서 발표한 한국의 독립을 선포한 선언서이다. 이것은 2·8 (동경유학생) 독립선언과 3·1 독립선언보다 앞서 이루어진 것으로 "대한은 완전한 자주 독립국임과 민주의 자립국임”을 선포하고 있다.
1919년 2월 1일이 음력으로는 1919년 1월 1일이었는데, 따라서 이것이 작성되고 서명된 것은 그 이전으로 보아 1918년 무오년에 작성되었다고 해서 '무오독립선언서'라고도 하며, 또한 기미년에 일어난 3·1 운동의 '기미독립선언'과 구별하기 위하여 '무오독립선언'이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 이 독립선언서는 석판으로 약 4천 부 가량 인쇄하여 박용만에 의하여 하와이 등 해외 독립운동가들에게 배포되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당대의 문장가 조소앙(趙素昻. 본명 조용은. 1887-1958)이 작성한 것으로 전해지며, 국한문 혼용체로 쓰였다. 이 독립선언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문으로 여기에 서명한 이들은 대부분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주도한 인물들로 독립운동의 주요 인물들이다.

 대한독립선언서

<대한독립선언서 > 

우리 대한 동족 남매와 온 세계 우방 동포여!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과 신성한 평등복리로 우리 자손 여민(黎民: 백성)에 대대로 전하게 하기 위하여, 여기 이민족 전제의 학대와 억압을 해탈하고 대한 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

우리 대한은 예로부터 우리 대한의 한(韓)이요, 이민족의 한(韓)이 아니라, 반만년사의 내치외교(內治外交)는 한왕한제(韓王韓帝)의 고유 권한이요, 백만방리의 고산(高山) 려수(麗水)는 한남한녀(韓男韓女)의 공유 재산이요, 기골문언(氣骨文言)이 유럽과 아시아에 뛰어난 우리 민족은 능히 자국을 옹호하며 만방을 화합하여 세계에 공진할 천민(天民)이라, 우리 나라의 털끝만한 권한이라도 이민족에게 양보할 의무가 없고, 우리 강토의 촌토라도 이민족이 점유할 권한이 없으며, 우리 나라 한 사람의 한인(韓人)이라도 이민족이 간섭할 조건이 없으니, 우리 한(韓)은 완전한 한인의 한(韓)이라.

슬프도다, 일본의 무력과 재앙이여. 임진 이래로 반도에 쌓아놓은 악은 만세에 엄폐치 못할지며, 갑오 이후 대륙에서 지은 죄는 만국에 용납지 못할지라. 그들이 전쟁을 즐기는 악습은 자보(自保)니 자위(自衛)니 구실을 만들더니, 마침내 하늘에 반하고 인도에 거스르는 보호 합병을 강제하고, 그들이 맹세를 어기는 패습은 영토니 문호니 기회니 구실을 거짓 삼다가 필경 불의로운 불법의 밀관협약(密款脅約)을 강제로 맺고, 그들의 요망한 정책은 감히 종교와 문화를 말살하였고, 교육을 제한하여 과학의 유통을 막았고, 인권을 박탈하며 경제를 농락하며 군경(軍警)의 무단과 이민이 암계(暗計)로 한족을 멸하고 일인을 증식[滅韓殖日]하려는 간흉을 실행한지라.

적극적, 소극적으로 우리의 한(韓)족을 마멸시킴이 얼마인가.

십년 무력과 재앙의 작란(作亂)이 여기서 극에 이르므로 하늘이 그들의 더러운 덕을 꺼리시어 우리에게 좋은 기회를 주실 새, 우리들은 하늘에 순종하고 인도에 응하여 대한독립을 선포하는 동시에 그들의 합병하던 죄악을 선포하고 징계하니,

1. 일본의 합방 동기는 그들의 소위 범일본주의를 아시아에서 실행함이니, 이는 동아시아의 적이요,

2. 일본의 합방 수단은 사기강박과 불법무도와 무력폭행을 구비하였으니, 이는 국제법규의 악마이며,

3. 일본의 합병 결과는 군경의 야만적 힘과 경제의 압박으로 종족을 마멸하며, 종교를 억압하고 핍박하며, 교육을 제한하여 세계 문화를 저지하고 장애하였으니 이는 인류의 적이라.

그러므로 하늘의 뜻과 사람의 도리[天意人道]와 정의법리(正義法理)에 비추어 만국의 입증으로 합방 무효를 선포하며, 그들의 죄악을 응징하며 우리의 권리를 회복하노라.

슬프도다, 일본의 무력과 재앙이여! 작게 징계하고 크게 타이름이 너희의 복이니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할지어다.

각기 원상(原狀)을 회복함은 아시아의 바램인 동시에 너희도 바램이러니와, 만일 미련하게도 깨닫지 못하면 화근이 모두 너희에게 있으니, 복구자신(復舊自新)의 이익을 반복하여 알아듣게 타이를 것이다.

보라! 인민의 마적이었던 전제와 강권은 잔재가 이미 다하였고, 인류에 부여된 평등과 평화는 명명백백하여, 공의(公義)의 심판과 자유의 보편성은 실로 광겁(曠劫)의 액(厄)을 크게 씻어내고자 하는 천의(天意)의 실현함이요, 약국잔족(弱國殘族)을 구제하는 대지의 복음이라.

장하도다, 시대의 정의여. 이때를 만난 우리는 함께 나아가 무도한 강권속박(强權束縛)을 해탈하고 광명한 평화독립을 회복함은, 하늘의 뜻을 높이 날리며 인심을 순응시키고자 함이며, 지구에 발을 붙인 권리로써 세계를 개조하여 대동건설을 협찬하는 소이로서 우리 여기 2천만 대중의 충성을 대표하여 ,감히 황황일신(皇皇一神)께 분명히 알리고[昭告] 세계 만방에 고하오니, 우리 독립은 하늘과 사람이 모두 향응[天人合應]하는 순수한 동기로 민족자보(民族自保)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함이요, 결코 목전의 이해[眼前利害]에 우연한 충동이 아니며, 은혜와 원한(恩怨)에 관한 감정으로 비문명한 보복수단에 자족한 바가 아니라, 실로 항구일관(恒久一貫)한 국민의 지성이 격발하여 저 이민족으로 하여금 깨닫고 새롭게 함[感悟自新]이며, 우리의 결실은 야비한 정궤(政軌)를 초월하여 진정한 도의를 실현함이라.

아 우리 대중이여, 공의로 독립한 자는 공의로써 진행할지라. 일체의 방편[一切方便]으로 군국전제를 삭제하여 민족 평등을 세계에 널리 베풀[普施]지니 이는 우리 독립의 제일의 뜻[第逸意]이요, 무력 겸병(武力兼倂)을 근절하여 평등한 천하[平均天下]의 공도(公道)로 진행할지니 이는 우리 독립의 본령이요, 밀약사전(密約私戰)을 엄금하고 대동평화를 선전(宣傳)할지니 이는 우리 복국의 사명이요, 동등한 권리와 부[同權同富]를 모든 동포[一切同胞]에게 베풀며 남녀빈부를 고르게 다스리며, 등현등수(等賢等壽)로 지우노유(知愚老幼)에게 균등[均]하게 하여 사해인류(四海人類)를 포용[度]할 것이니 이것이 우리 건국[立國]의 기치(旗幟)요, 나아가 국제불의(國際不義)를 감독하고 우주의 진선미를 체현(體現)할 것이니 이는 우리 대한민족의 시세에 응하고 부활[應時復活]하는 궁극의 의의[究竟義]니라.

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同心同德] 2천만 형제자매여! 우리 단군대황조께서 상제(上帝)에 좌우하시어 우리의 기운(機運)을 명하시며, 세계와 시대가 우리의 복리를 돕는다.

정의는 무적의 칼이니 이로써 하늘에 거스르는 악마와 나라를 도적질하는 적을 한 손으로 무찌르라. 이로써 5천년 조정의 광휘(光輝)를 현양(顯揚)할 것이며, 이로써 2천만 백성[赤子]의 운명을 개척할 것이니, 궐기[起]하라 독립군! 제[齊]하라 독립군!

천지로 망(網)한 한번 죽음은 사람의 면할 수 없는 바인즉, 개·돼지와도 같은 일생을 누가 원하는 바이리오. 살신성인하면 2천만 동포와 동체(同體)로 부활할 것이니 일신을 어찌 아낄 것이며, 집안이 기울어도 나라를 회복하면 3천리 옥토가 자가의 소유이니 일가(一家)를 희생하라!

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자매여! 국민본령(國民本領)을 자각한 독립임을 기억할 것이며, 동양평화를 보장하고 인류평등을 실시하기 위한 자립인 것을 명심할 것이며, 황천의 명령을 크게 받들어(祇奉) 일절(一切) 사망(邪網)에서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

단군기원 4252년 2월 일

김교헌(金敎獻)·김규식(金奎植)·김동삼(金東三)·김약연(金躍淵)·김좌진(金佐鎭)·김학만(金學滿)·문창범(文昌範)·박성태(朴性泰)·박용만(朴容萬)·박은식(朴殷植)·박찬익(朴贊翼)·손일민(孫一民)·신규식(申圭植)·신채호(申采浩)·안정근(安定根)·안창호(安昌浩)·여준(呂 準)·류동열(柳東說)·윤세복(尹世復)·이광(李 光)·이대위(李大爲)·이동녕(李東寧)·이동휘(李東輝)·이범윤(李範允)·이봉우(李奉雨)·이상룡(李相龍)·이세영(李世永)·이승만(李承晩)·이시영(李始榮)·이종탁(李鍾倬)·이탁(李 沰)·임방(任 邦)·정재관(鄭在寬)·조용은(趙鏞殷)·조욱(曺 煜)·최병학(崔炳學)·한흥(韓 興)·허혁(許 爀)·황상규(黃尙奎)

< 2·8 독립선언>(二八獨立宣言)

2·8 독립선언은 무오독립선언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것으로 신한청년단의 이광수와 조소앙이 동경에 가서 재일 유학생들을 지도하였다. 와세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던 이광수는 베이징에 갔다가 "민족자결주의" 소식을 듣게 되면서 서울에 가서 현상윤, 최 린 등과 독립운동을 논한 뒤에 동경에 돌아와 와세다 대학의 최팔용 등과 의기투합하였다. 

그러던 중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12월 15일자 고베에서 영국인이 발행하던 영자신문 「일본 애드버타이즈」(The Japan Advertise)에 「한국인, 독립을 주장」(Koreans, Agitate for Independence)이라는 기사에 재미교포들이 대한독립을 위하여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했다는 기사와 18일자에 「약소민족들 발언권 인정을 주장」(Small Nations Ask To Be Recognized)이라는 두 기사가 실리면서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광수는 민족대회소집청원서 및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초안을 만들고 일본어와 영문으로 번역한 뒤 최팔용의 권유로 1월에 상하이로 도피했다. 최팔용은 일본어로 된 소집청원서를 2월 7일에 1천부를 인쇄하고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은 등사판으로 밀고 영문은 타자를 쳐서 준비했다.
2월 8일 오전 10시 준비된 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 및 결의문를 동경 주재 각국 대사관과 공사관, 일본정부의 각 대신들과 조선총독과 신문사에 우편으로 발송하였다. 
그리고 오후 2시에 기독교청년회관(YMCA) 1층 강당에 재일 유학생 6백여 명이 모여 최팔용이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했다. 백관수가 2·8독립선언서를, 그리고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독한 뒤 윤창석이 기도를 하며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이들은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은 자주민"임을 선언하였고, "만일 이로써 성공하지 못하면 온갖 자유행동을 취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열혈을 흘릴 것이며, 영원한 혈전(血戰)을 불사한다"라며 독립이 되지 않으면 일제와 영원히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것이라는 강력한 메세지를 선언했다. 특히 민주주의 선진국의 모범을 따라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고 반드시 세계평화에 공헌할 것을 선언하였는데, 이는 해외에 나가서 공부하는 유학생들로서 세계 정세에 대한 인식이 뛰어남을 보여준다.
2·8 독립선언은 3·1 독립선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2·8 독립선언서를 기초로 3·1 독립선언서가 작성되었는데 '피의 전쟁'(혈전)과 같은 과격한 문장은 배제하였다.

1919년 1월에 일본 고베를 떠나 중국 상하이로 간 이광수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을 비롯한 여러 인사에게 영문으로 된 2·8 독립선언서를 보냈다.

2·8 독립선언서

< 2·8 독립선언서 현대어 전문>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를 쟁취한 세계 모든 나라 앞에 독립을 성취할 것을 선언한다. 4천3백여 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 민족은 실로 세계에서 가장 오랜 민족의 하나이다. 비록 한때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 일이 있었으나 이는 양국 황실의 형식적 외교관계에 불과할 뿐, 조선은 항상 우리의 조선이었고 통일된 국가를 잃고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일본은 조선과 일본이 긴밀한 관계에 있다고 하면서 1894년 청일전쟁에 승리한 후 한국의 독립을 앞장서 승인하였다. 영국, 미국, 불란서, 독일, 러시아 등도 뒤따라 한국의 독립을 승인할 뿐 아니라 이를 계속 보전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에 한국은 여러 국가들의 후의에 감사하면서 의욕적으로 제반 개혁과 국력의 충실을 도모하였다. 당시 러시아의 세력이 남하하여 동양평화와 한국의 안녕을 위협하게 되자 일본이 한국과 공수동맹을 체결하여 러일전쟁을 일으켰음을 볼 때 동양의 평화와 한국의 안녕은 한일 공수동맹의 주된 취지였다. 
이에 한국은 더욱 일본의 호의에 감사하여 육해군의 군사적 지원은 못하였지만 주권의 위엄을 희생하면서까지 가능한 모든 의무을 다하여 동양평화와 한국독립이라는 양대 목적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종결되어 당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이루어진 강화회의에서 일본은 동맹국인 한국인의 참가를 가로막고 러시아와 일본, 양국 대표자의 임의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종주권을 의결하였다.
일본은 우월한 병력을 가지고 한국의 독립을 보전한다는 본래의 약속을 위반할 뿐 아니라 무력한 한국 황제와 그 정부을 위협하고 기만해서, 한국의 국력이 충실하여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라는 조건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함으로써 그들의 보호국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한국은 세계 각국과 직접적인 외교관계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나아가 상당한 시기까지라는 조건으로 사업․경찰권을 박탈하고 다시 징병령 실시까지라는 조건으로 군대를 해산하였다. 이에 따라 민간의 무기를 압수하고 일본군대와 헌병․경찰이 각지에 배치되었으며 심지어 황궁의 경비까지도 일본경찰이 담당하게 되었다. 
일본은 이렇게 한국으로 하여금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하도록 한 후에 현명한 군주로 추앙받던 광무황제를 폐위 시키고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황태자를 옹립하였으며, 일본의 앞잡이들로 소위 합병내각을 조직하여 무력으로 위협하면서 비밀리에 합병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우리 민족은 건국이래 반만년에 우리를 이끌어주고 원조하겠다던 일본의 군국주의적 야심에 희생되었던 것이다. 실로 한국에 대한 일본의 행위는 사기와 폭력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 같은 엄청난 사기는 세계 역사상 특필할만한 인류의 치욕이라 하겠다.
보호조약을 체결할 때 적신을 제외한 대신들은 온갖 저항을 다하였고, 발표 이후 온 국민들도 가능한 모든 저항을 다하였다. 사법․경찰권의 피탈과 군대해산 직후에도 그러하였으며, 합병 당시에는 아무런 무력수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모든 저항을 시도하다가 일본의 정예한 무력 앞에 희생된 자 부지기수였다. 이 후 10년간 한국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으로 인해 희생된 자 역시 수십만을 헤아리며, 악독한 헌병정치하에서 언행의 자유를 구속받으면서도 독립운동은 끊어진 적이 없었으니 이를 보더라도 한일합병이 조선 민족의 의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우리 민족은 일본의 군국주의적 야심에서 비롯한 기만과 폭력 아래 우리 민족의 의사에 반대되는 운명을 당하였으니, 정의로 세계를 개혁하는 지금 우리는 당연히 그 사정을 세계에 요구할 권리가 있으며, 세계의 주도적 위치에 있는 미국과 영국은 한국의 보호와 합병을 솔선하여 승인한 과거의 잘못의 대가를 지불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합병이래 일본의 조선통치정책을 보면 합병시의 선언과는 반대로 우리 민족의 행복과 이익을 무시하고 고대 정복자들의 피정복자에 대한 비인도적 정책을 본뜨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참정권, 집회결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등을 불허하며 심지어 종교의 자유, 기업의 자유까지 적지 않아 구속하고 나아가 행정, 사법, 경찰 등 모든 기관은 조선민족의 개인적인 권리마저 침해하고 있다.
또 공적, 사적으로 우리 민족과 일본인간에 우열의 차별을 두어 우리 민족에게는 일본인에 비하여 열등한 교육을 시킴으로써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영원히 일본인의 지배를 받게 하려하며, 역사를 개조하여 우리민족의 신성한 역사적 전통과 위엄을 파괴하고 업신여기고 있다. 소수의 관리를 제외하고는 정부기관과 교통, 통신, 군대 등의 기관에 전부, 혹은 대부분 일본인을 고용하여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국가운영의 능력과 경험을 획득할 기회를 전혀 갖지 못하게 하니 이와 같은 무단․전제, 부정․불평등한 정치하에서 우리 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기대하기란 실로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뿐 아니라 본래 인구가 많은 조선에 일본인의 이민을 무제한 장려하고 보조함으로써 토착민인 우리 민족은 해외로 정처없이 떠나지 않을 수 없으며, 정부의 모든 기관은 물론이요 사설기관까지 일본인만을 고용하여 하루아침에 조선인의 재산을 일본으로 유출시키고, 상공업에서도 일본인에게만 특혜를 부여함으로써 우리 민족은 산업발전의 기회조차 가질 수 없게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어떤 방면을 살펴보아도 우리 민족과 일본의 이해는 상호배치되어 그 해를 입는 것은 우리 민족이니 우리 민족은 생존의 권리를 위해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다.
끝으로 동양평화의 측면에서 보건대 위협의 대상이던 러시아는 지금 군국주의적 야심을 포기하고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새 국가의 건설에 종사하는 중이며, 중국도 또한 그러하고, 나아가 국제연맹이 실현됨에 따라 다시는 군국주의적 침략을 감행할 강국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최대 이유는 이미 소멸되었다. 조선민족이 끊임없이 저항운동을 전개한다면 일본에 의해 합병된 한국은 오히려 동양평화를 깨뜨릴 화근이 될 것이다. 우리 민족은 정당한 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자유를 추구할 것이나 만일 이로써 성공하지 못한다면 우리 민족은 생존의 권리를 위해 모든 자유행동을 취하면서 최후의 1인까지 자유를 위한 뜨거운 피를 뿌릴 것이니 이 어찌 동양평화의 화근이 아닐 것인가? 
우리 민족에게는 군대가 없으므로 우리는 무력으로 일본에 저항할 실력은 없다. 그러나 만일 일본이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한다면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한 혈전을 선포할 것이다. 우리 민족은 오랫동안 고상한 문화를 지녀왔고 반만년동안 내려온 국가생활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비록 다년간의 전제정치 하에서 일어난 해독과 불행이 우리 민족을 이 지경으로 이끌었다 하더라도 건국이래 문화와 정의와 평화를 애호하는 우리 민족은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한 민주주의 선진국의 모범을 본받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후 세계평화와 인류문화에 공헌할 수 있을 것임을 확신하는 바이다. 이에 우리 민족은 일본을 위시한 세계 각국의 우리 민족에게 민족자결의 기회를 부여할 것을 요구하며, 만일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 민족은 생존을 위해 자유행동을 취함으로써 독립을 성취할 것을 선언한다.
결 의 문
1. 우리는 한일합병이 우리 민족의 자유의사에서 비롯되지 않았으며, 그것이 우리 민족의 생존.발전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저해하는 원인이 된다고 생각하므로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다.
2. 우리는 일본의회 및 정부에 대해 조선민족대회를 소집하고 대회의 결의에 따라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기회를 부여할 것을 요구한다.
3. 우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대해 민족자결주의를 우리 민족에게 적용할 것을 청구한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본에 주재하는 각국의 대사, 공사에게 우리의 의사를 그들 정부에 전달해 줄 것을 요구하며 동시에 위원 3인을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한다. 이들 위원은 이미 파견된 우리 민족의 위원과 함께 행동을 취할 것이다.
4. 앞의 세 가지 요구가 실현되지 않을 경우,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한 혈전을 선언한다. 이로써 발생하는 참화에 대해 우리 민족은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을 것이다.

1919년 2월 8일
재일본동경조선청년독립단대표
최팔용 윤창석 이종근 이광수 최근우 서 춘 백관수 김도연 송계백 김철수 김상덕

(계속)

김수경목사 kimsoogy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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