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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구 칼럼】광복 74년, 건국 71년

정성구 박사 기자   기사승인 2019.08.17  00:2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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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구 박사(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1948년 8월 15일 미국의 뉴욕타임스 조간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톱뉴스가 나왔다.(The New York Times, 1948. 8. 15. New York. Sunday) 즉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에 의해서 주권국가가 선포되었다. 국가 이름은 The Republic of Korea로 한국말로는 대한민국(Tai Han Min Kook)이라 하였다.” 했고, 대한민국은 자유(Freedom)와 민주주의(Democracy)를 표방한다고 썼다. 특파원 리처드 J. H. 존스턴은 헤드라인으로 「Korea Set Up Republic」이라 했고 부재로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된지 3년 만에 미군정에 종지부를 찍고 남한 단독으로 주권국가를 선포하다”라고 했다. 

대한민국의 건국일은 1948년 8월 15일이고, 우남 이승만 박사는 초대 대통령이자 국부(國父)였다. 유엔(U.N)은 1948년 12월 12일에 대한민국이 한반도에 유일한 합법정부로 결의했다. 대한민국의 건국일을 부정하는 것은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북한 정권은 지난 70년 동안 대한민국을 부정하며 국산주의 통일을 위해 온갖 침략을 일삼아 왔다. 오늘의 정치권과 교육계와 역사학계는 상해 임시정부의 의미를 크게 보는 것은 좋은 일이나, 대한민국의 건국일을 부정하거나 무의미하게 만드는 듯한 인상을 받는 것은 나뿐만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이 태어나기까지 공산주의자들이 길길이 날뛰며 얼마나 많은 파괴와 방해공작을 했는지는 역사적으로 모두 증명된 마당에 여기서 모두 언급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최근에 학계와 정치계는 이승만이 만든 <대한민국>은 바로 남북 분단의 원인이라고 말하면서, 상해 임시정부의 의미를 오늘의 되살려 <우리는 하나>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 안에는 공산주의자와 이승만과 같은 자유 민주주의 주창자들과 더불어 있었으니 다 함께 평화 공존 모델로 삼을 만하다는 발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생일을 모르는 사람은 사생아라 할 수 있다. 건국일도 모르는 나라 백성은 사생아란 말인가?

3·1 운동의 위대함은 세계적으로 평가받을 것이다.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도 나라의 독립을 찾으려는 선각자들의 삶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하지만 상해 임시정부에는 공산주의자들이 많았고, 상해 임시정부는 실제로 대한민국의 건국과 연속성 없고 임정 요원들은 해방 후에 한참 후 개인적으로 한 분씩 귀국했다. 김구 선생 같은 독립운동의 대표자는 좌우 합작, 통일 한국을 열기 위한 그의 열정이 도리어 김일성에게 실컷 이용당하고 말았다. 김구 선생은 민족주의자로서 오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리는 하나>에 올인 하였다. 이승만은 김일성이 주도하는 남북협상이 실패로 돌아갈 것을 예견하고 김구 선생의 주위를 극구 말렸으나 무위로 돌아갔다.

유엔이 1948년 2월 26일 감시가 가능하고 자유선거가 가능한 남한만이라도 자유총선거를 하기로 결의함에 따라, 1948년 3월 17일 국회의원 선거법이 발표되어 5월 16일에 투표하기로 결정되었다.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자유진영이 5·10 선거 준비를 하는 동안 중도좌파 세력과 김구 세력의 5·10 선거 반대로 남한 사회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총선 반대 저지를 위한 선거 업무 방해는 무장 폭동 등 다양한 투쟁으로 선거를 방해했다.

이러한 와중에 김일성이 남파한 간첩 <성시백>이 내민 김일성의 초청장을 받아 쥔 김구와 김규식 등 일행이 김일성의 각본에 따라 개최되는 남북협상, 즉 남북 연석회의에 참석하러 1948년 4월 19일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갔다. 바로 이때 여기저기서 공산당의 무장 폭동이 일어나 남한 사회는 내란에 가까운 혼란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김구는 남북통일 정부라는 이상에 함몰되어 현실에 대해서나 국제정치에 너무나 어두웠다. (김현태 편,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불편한 진실, 범아 출판. p23) 특히 김구가 월북했을 당시, 북한에서는 이미 북한 헌법이 제정되고, 공산정권 수립의 절차가 착착 진행되고 있음을 목격하고도, 김구 일행은 평양에서 붉은 군대의 사열까지 받았다. 김구는 이러한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국민을 기만했다. 김구를 위시한 남북협상(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파들은 김일성과의 약속에 따라 5·10 선거를 철저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있던 그 날, 김구는 말하기를 「비분과 실망이 있을 뿐이다. 새로운 결심과 용기를 가지고 강력한 통일운동을 추진해야 하겠다」(김현태 p.24) 고 했다. 김구 선생은 위대한 독립운동가이기는 해도, 철저한 민족주의자로서 남북합작, 민족통일을 염원한 나머지 결과적으로 공산당에 이용되고 말았다. 한편 지금도 비판자들은 이승만을 남북분단의 책임자로 몰아붙였다. 남쪽의 공산당 박헌영의 계략과 술수로 대한민국은 공산화될 뻔 했으나, 박헌영은 도리어 김일성에게 당하고 말았다.

지난 70여 년 동안 모든 언론, 역사가들, 교육가들은 남북통일, 민족통일과 화해와 평화를 앞세워서 우남 이승만 박사에게 흠집 내기와 이승만 약점 캐기, 이승만 죽이기를 앞다투어 해왔다. 이른바 역사를 알고 정치를 안다는 학자들과 논객들이 마치 이승만 비판을 해야 신지식인인 듯 생각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북한에서는 모든 교과과정에서 이승만 폄하와 죽이기를 했고, 김일성이 세운 북조선 공산주의 집단만이 정통인 듯이 세뇌했다.

어찌 된 일인지 자유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난 부모도 태어난 생일도 부정하는 꼴이 되었다. 최근에 이르러야 연세대학교 안에 <이승만 연구소>가 만들어지고 이승만 전집출간을 위해 준비 중이다. 또 깨어있는 학자들이 그간의 상식으로 알려졌던 이승만을 재조명하고 우남 이승만 박사의 대한민국 국부로서 위대한 정치가요 외교가요, 전략가로 다시 보기 시작한 것은 고무적이다. 하지만 이승만 연구소도 재정후원이 없어 커다란 어려움에 있다고 한다. 필자는 3·1 운동 100주년과 상해 임시정부 100주년을 기해서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위해서 해외에서 40년을 일하신 건국 대통령을 다시 생각하고자 한다.

첫째로 우남 이승만 박사는 청빈하고 깨끗한 대통령이었다. 1980년대 나는 이승만 박사의 사저였던 <이화장>에 가서 예배를 인도했다. 그때 나는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나고 양자 이인수 박사 내외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이승만 박사의 유품들을 돌아보았다.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는 경무대의 살림살이가 얼마나 검소했으면 양말을 기워 신은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 후 하와이 대학의 동서센터연구소에 자료를 보니, 이승만 박사는 사탕수수밭에 일하던 동포들의 1불, 2불 헌금을 받고 영수처리 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국부, 이승만 박사는 40여 년간 국내외에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깨끗하게 살았다. 이승만은 나라의 독립과 건국을 위해서 평생을 바쳤으나 그가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둘째로 우남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가로서의 일생은 동서양 학문을 통달하고 어학의 천재요, 외교의 귀재로서뿐만 아니라 문필가로서 우리 민족의 등불이었다. 그의 <독립정신><일본 내막기><일민주의> 등의 저서나 그의 국제무대의 연설 등은 국내외의 모든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였음이 입증되었다. 미국 국회를 비롯한 미국의 정치무대에서 연설한 것과 두 번에 걸친 타임(The Time)지 표지 모델과 특집을 보면 이승만은 미국마저도 만만히 볼 수 없는 대인이었다.

셋째 우남 이승만 박사는 신앙의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을 기독교 입국으로 세우려 했다.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선교사들을 만나 성경을 배우고 복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학교와 도서관을 만들 정도로 신앙의 사람으로 학자였고 언론인이었다. 배제학당에서 기독교와 접촉하여 인생관과 세계관이 바뀐다. 사람들은 배제학당, 하와이 감리교회, 정동감리교회 장로 등을 들어서 그를 감리교인이라고 한다. 그 말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승만은 어느 교파, 어느 교단 사람이 아니었다. 1904년 미국으로 유학 가기 전에 남궁혁 박사 댁에 머물면서 신앙의 지도와 사랑을 받았다. 남궁혁 박사는 조부가 평양감사를 지냈던 부유한 양반으로 후일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신학교에서 최초로 한국인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이승만 박사는 미국에 가서 1904년 4월 23일 워싱턴 D. C. 의 커버넌트 장로교회 루이스 헴린(Rev. Lewis Hamlin)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커버넌트 교회는 스코틀랜드 정통 장로교회였다. 이승만이 워싱턴 대학교에서 공부할 때에 이 교회에서 철저한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의 신앙 곧 칼빈주의 신앙을 배웠으리라고 본다. 특히 프린스턴 대학교에 박사학위를 공부할 즈음에 이승만은 일 년 동안 신학 공부에 주력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프린스턴 대학과 프린스턴 신학교는 경계가 없고 한 캠퍼스이다. 그 시절에는 학문의 분화(分化)가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므로, 이승만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1년간 공부하는 동안 당대의 프린스턴 신학의 대표적 학자인 비 비 월필드(B. B. Warfield)와 겔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박사 아래서 공부했을 것이다.

당대의 비 비 월필드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세계 3대 켈빈주의 학자였다. 월필드 박사는 1902년에 교장직에서는 물러났지만 여전히 구 프린스턴을 대표하는 교수였다. 한편 성경 신학의 아버지 보스(G. Vos)박사는 화란 이민자로서 철저한 켈빈주의 신학자였고,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보는 성경 신학(Biblical Theology)의 창시자였다. 특이한 것은 그의 아들 요하네스 겔할더스 보스(Johannes Geerhardus Vos)목사는 만주 한인들을 위한 선교사로 한부선 목사와 함께 일본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500인 서명을 주도했는데, 한부선 목사는 이 사건을 <한국의 언약도>로 명명했다. 후일 J. G. 보스 목사는 커버넌트 후예들이 세운 피츠버그에서 가까운 제네바대학(Geneva College 1848)의 교수를 지냈다.

이승만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1년 동안 라틴어, 헬라어,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즉, 그는 프린스턴 신학교 기숙사인 핫지홀(C. Hodge Hall)에 머물면서 1년간 신학 공부를 했다. 그 후에 그는 윌슨(Willson) 총장의 사랑을 받으면서 정치학으로 철학박사(Ph. D.) 학위를 받게 된다. 아마도 이승만 박사의 세계관은 프린스턴에서 공부하는 중 켈빈주의적 세계관을 배웠으리라고 본다. 특히 프린스턴 신학교의 밀러 채플이나, 프린스턴 대학 채플에 참석하여 예배를 드렸고, 당대의 프린스턴 석학들의 설교와 강의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프린스턴 신학교는 아브라함 카이퍼 영향이 컸는데 아브라함 카이퍼는 화란의 푸라야대학(Vrije Universiteit)를 세운 대 켈빈주의 학자요 정치가로서 화란 수상을 지냈다. (1901-1905) 현재 프린스턴 신학교 안에 <아브라함 카이퍼 연구소>가 있는 것을 보면, 1898년에 비 비 월필드 박사가 아브라함 카이퍼를 초청해서 <켈빈주의 특강>을 하게 하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명예 법학박사를 수여한 일이 있다. 아마도 이승만 박사의 가슴에는 카이퍼가 꿈꾸던 이상대로 장차 대한민국이 독립국으로 세워진다면 하나님 중심, 그리스도 중심, 성경 중심의 기독입국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되어 대한민국을 세울 때, 먼저 이윤영 목사를 불러내어 기도하게 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기도로 세워진 나라였다. 그래서 우남 이승만이 대통령 재임 시 토지개혁, 군목제도, 경목제도 등을 만들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성경 사랑과 기도의 사람인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사실 이승만 박사는 미래 통찰과 예지가 넘치는 세계적 지도자였다. 재임 중에 한미 상호방위조약과 오늘의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기초를 든든히 놓았다. 그는 40년 동안 오직 조국 독립을 위해서 일하고, 이 나라를 건국한 국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박사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에, 북쪽 공산주의자들은 이승만 박사가 미 제국주의와 함께 하는 민족의 원수라고 선전 선동했다. 거짓말도 자주 들으면 사실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더구나 나라 전체가 세작들에게 노출되고 집단으로, 교육계, 언론계, 학계가 담합하여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이때 이승만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승만은 남북분단의 책임자라는 것도 거짓이고, 친일 청산을 하지 않았다는 것도 거짓이고, 3·15 부정 선거를 했다는 것도 잘못이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야당대표 조병욱 박사가 선거일 한 달 전에 위암으로 이미 세상을 떴으니, 뭐가 답답해서 부정선거를 했단 말인가? 다만 최인규 내무장관을 위시한 참모들이 과잉 충성한 것은 맞다. 4·19 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 박사가 먼저 하야하겠다고 했고, 절대로 학생들을 다치게 하지 말라고 했고, 하야 후에 걸어서 이화장으로 갔다. 그리고 다친 학생들을 위로 격려했다. 세계 어느 독재자가 이렇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70년간이나 3대 세습 독재체제와 북한의 인권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 못하면서, 자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평생을 바친 우남 이승만 박사를 말끝마다 독재자로 몰아세우고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 공산주의자들을 예찬하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세상의 지도자들 모두가 완전한 자는 없다. 이승만도 인간적 약점이 있다. 하지만 우남 이승만 박사가 없었으면 대한민국은 없었다는 올리버 박사의 말은 옳다고 본다. 나는 미국의 많은 대통령의 기념관을 직접 가서 보았다. 그 대통령이 모두 잘한 것은 없지만, 장점만 높이 세워 그의 사상과 삶을 기념하는 것을 보았다. 역시 미국은 미국이었다. 건국 70년 동안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기념관 하나 못 세우는 우리들의 모습이 참으로 부끄럽다.

1954년 8월 13일 U. S. News & World Report에서, 우남 이승만 박사와 장문의 특별 인터뷰에서 이 박사의 핵심 메시지는 “공산주의자에게 굴복하지 마라”(Don’t surrender to Communists)였다.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박사의 공적은 이 땅에 공산주의를 몰아내고,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일이었다.

정성구 박사 webmaster@bonhd.net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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