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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칼럼】 주께서 주신 사명에 생명을 바치는 자는 아름답다

이승희 목사 기자   기사승인 2019.08.27  09: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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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22) 사명(使命)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D.Min.),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사명’하면 국민교육헌장을 떠 올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한다. 역사적 사명이기에 제법 거창해 보인다. 목숨이라도 걸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바울의 사명도 이렇게 거창할까. 역사적 사명일까. 바울은 주 예수님께 사명을 받았다. 사명이 무엇인가. 사명에 해당하는 ‘διακονια’(디아코니아)는 섬김, 봉사라는 뜻이다. 신약에서 이 단어는 첫째로 ‘식탁에서 서빙하기, 육신의 양식을 조달하기’ 혹은 ‘식사를 관장함’을 의미한다. 보다 넓은 의미는 ‘사랑에 찬 섬김의 수행’이다. 다양한 봉사들이 존재한다(고전 12:4 이하). 그러나 이 모든 봉사들이 다 하나님께 바쳐진다.

사명을 수행하는 자를 ‘사명자’라 한다. 헬라어 원문의 의미를 살리면 분위기가 확 다르다. 세 자로 ‘섬김이’, 두 자로 하인, 한 자로 종(奴)이다. 더 실제적으로 말하면 노예다. 자발적인 노예다. 신약성경에서 보통 ‘섬긴다’는 뜻을 지닌 ‘διάκονος’(디아코노스)는 종이나 하인, 다른 사람을 시중드는 사람, 심부름하는 사람을 뜻한다. KJV은 이 단어는 빌립보서 1:1과 디모데전서 3:8, 12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하인(minister)이나 종(servant)으로 번역되었다. ‘주’에 해당하는 ‘κύριος’(퀴리오스)는 윗사람에 대한 공손한 높임말일 뿐만 아니라 집주인이나 가장이나 나라의 왕에게 대한 복종을 뜻하는 말이다. 바울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상에서 조상의 하나님이신 퀴리오스께서 히브리 방언으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는데 그 분이 사울이 박해하는 예수님이라고 했다. 바울의 퀴리오스는 부활승천하여 하늘 보좌에서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시다. 만왕의 왕이신 만유의 주되신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사명을 주셨는데, 이방인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1.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무엇인가

주인과 주인공은 다르다. 주인은 소유물이 있어야 주인 행세를 한다. 주인공은 무소유여도 가능하다. 두 질문에 주목하자. “내 삶의 주인이 누구냐?” “내 삶의 주인공이 누구냐?” 사람은 편리에 따라 주인을 언제라도 바꾼다. 자신은 주인공으로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주인공은 누구인가. 바울은 이렇게 대답한다. 로마서 14:8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답은 간단하다. 주인도 주인공도 예수님이라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다. 사느냐 죽느냐. 이것은 더 이상 바울에게 질문이 아니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 바울은 초지일관 그의 생애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에게 주어진 사명, 즉 섬김이었다. 바울이 전하는 그 사명, 즉 바울이 섬겨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다. 영적인 양식을 배분하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사명은 가르치는 기술이나 재능이 아니다. 오로지 그가 증거하는 것만이 곧 그의 사명, 즉 그의 봉사라고 한다.

환대(hospitality)와 적대(hostility)의 어원이 되는 프랑스어 ‘hote’에는 ‘주인’과 ‘손님’의 뜻이 다 있다. 바울에게 예수님은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다. 바울은 주되신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 즉 영적 양식인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자기생존권보다 더 우선순위에 두었다.

일본의 주인이 누구일까. 이토 히로부미가 만들어 1889년에 공포한 첫 번째 헌법에서 일본의 주인은 천황이었다. 1조에서 ‘일본은 천황이 통치한다’, 3조에서 ‘천황은 신성하다’고 했다. 현재 사용하는 두 번째 헌법 1조에 보면 천황은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고 나라의 주인 되는 권리, 즉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되어 있다.

바울은 임의로 주군을 바꾸지 않는다. 자신은 주인되신 예수님께 디아코니아를 받은 자는 종이요 하인이라는 고백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주인이 종에게 임무를 주는 데 종에게는 그것이 주인을 섬기는 것이기에 사명이다. 여기에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임무를 완수하는 것은 기본이다. 역사적이지 않다. 대단한 것이라 우러러 볼 게 아니다. 주인은 자기 목소리를 내는 존재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남을 움직이게 하는 힘을 지닌다. 남을 움직이는 힘이 있기에 세상도 바꾼다. 중국 근대 사상가 루쉰은 이렇게 말한다. 노예는 아무나 붙잡고 고통을 호소하고자 할 뿐이고, 딱 그만큼의 능력을 지닐 따름이다. 그렇다. 이방인의 선교사로 불러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라는 목소리를 내신 분은 주 예수님이다. 바울은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고자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행하게 된다. 그곳에서 선교대회를 열고, 축하연을 벌이고, 휴가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바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 사명이다.

사명은 소명과 함께 놓일 때 이해하기 쉽다. 소명은 왕이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어떤 사명으로의 부름을 뜻한다. 사명은 소명을 받은 자가 감당해야 할 의무나 책임, 즉 소명 받은 자의 과업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처음부터 이방인의 선교사라는 소명을 받았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이방인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에게까지 전해야 할 사명이 있다.

바울이 주 예수님께 받은 사명은 섬기라 또는 봉사하라는 뜻이다. 동사 ‘διακονέω’(디아코네오)의 구체적인 의미는 ‘식탁에서 봉사하다’, ‘(포괄적으로) 섬기다’이다. 그리스어를 쓰는 헬라인들은 섬김을 선호하지 않았다. 품위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왜일까. 그들은 섬기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지배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처음부터 사명을 위해 부름을 받았고, 3차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그 사명을 새롭게 한다.

 

2. 사명을 마치기까지 생명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다

실제로 사람들이 인간관계에서 목숨을 거는 경우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자기를 인정해 준 사람에게 보답을 하기 위해서다. 두 번째는 그 반대로 자기를 무시한 사람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이다. 바울의 경우는 전자에 가깝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잊히는 것도, 익숙한 곳을 떠나는 것도, 조롱과 비난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느냐는 질문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사명자는 오직 사명을 주신 분께만 대답하면 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예수님께 받은 사명을 마치기까지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내 생명은 내 것이라고 하면 당연히 아껴야 한다. 그런데 그 생명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달라야 한다. 가령 휴가 가는 이웃이 애완견을 맡겼다고 가정해보자. 애완견의 종류나 가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웃이 누구냐에 따라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직장 상사나 고위공직자가 맡겨도 애지중지할 것인데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맡겨준 생명이라면 말이 달라지지 않겠는가. 내 생명을 내 것처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위해 사용해야 하지 않는가.

스위스의 신학자 Karl Barth는 “섬김의 삶은 자기의 목적이나 계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필요와 의도와 지시에 따라서 행동할 때의 의지(Will)와 수고(Working), 행동(Doing)”이라고 정의 했다.사명을 수행하는 자는 누구인가. 하나 밖에 없는 생명까지 바칠 정도로 중요한 일인가. 도대체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 일을 하게 하는가. 사명에 해당하는 ‘디아코니아’는 종이 주인을 위해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하는 때 사용하는 단어다. 디아코니아의 보다 특별한 의미는 어떤 임무들의 수행이다. 로마서 11:13에서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자신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긴다고 할 때 직분에 해당하는 단어가 디아코니아이다(고후 4:1). 바울이 디모데에게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할 때 직무가 디아코니아이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서 직분을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요, 디모데가 전도자의 일을 하며 자신의 직무를 다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예뻐하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士는 爲知己者死하고 女는 爲悅己者容이라)는 유명한 문구가 나온다. 이는 중국 전국시대 진(晉)나라 사람인 예양(豫讓)이 한 ㄴ말이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고 높이 들어 써주었던 지백(智伯)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가 조봉암(曺奉岩)의 명언이 망우리 공동묘지의 어록비에 새겨져 있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 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 하냐.”

바울은 헬라인들의 견해와 완전히 다른 섬김에 대해 말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섬김은, 즉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 대한 섬김을 의미한다. 따라서 개인적 헌신을 요구한다. 세상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지배하고 군림한다. 좌지우지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세상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로 이끄는 길로 자신이 달려가고자 할 때 섬김을, 즉 사명의 특징으로 하고 있는 고난과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아까지 않겠노라고 다짐한다. 인도의 음유시인이자 명상가인 Indra Chauha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생을 바쳐도 되겠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일을 찾으라. 그것은 마음과 영혼이 기뻐하는 일이어야 한다. 마음도 몸도 피곤하지 않은 일, 이것이 세상에서 해야 할 사명이다.”

 

이승희 목사 titeioslee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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