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영웅을 고대하는 지루한 시대

영웅은 태어나는 것도 아니요 길러지는 것도 아니다. 영웅은 시대의 산물이다. 군중은 늘 지구에 산적한 재앙의 불씨들을 잠재울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기다린다. 영웅이 활보하는 거리에 허구 속의 이야기는 숨고 사실이 이야기꽃을 피운다. 신화는 죽고 실화가 생기를 내뿜는다. 영웅이 사라지면, 영웅의 등장이 늦어지면, 세상은 영웅의 나타남을 눈이 빠지게 기다린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 지친 대중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한 영웅 만들기가 시도된다. 영웅의 그림자조차 발견할 수 없는 밋밋한 시대일수록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것은 영웅 이야기다. 화면을 뜨겁게 달구는 것은 대중의 한과 슬픔을 한방에 날려버릴 영웅이다.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몸으로 풀어가는 작은 영웅들이 신화의 벽을 뚫고서 작고 큰 브라운관과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오길 고대한다.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은 수많은 영웅들이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기원전 334년 원정길에 오른 알렉산더 대왕이 이 매듭을 풀겠노라고 나섰다. 아무도 해내지 않은 방법으로 풀리지 않던 그 매듭을 풀었다. 그는 칼로 매듭을 단칼에 쳐냈다. 풀어서 푼 것이 아니라 잘라서 풀었다. 대담한 발상이었다.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알렉산더는 신탁의 예언대로 아시아의 정복자가 되었다. 만일에 그가 매듭을 조각내지 않고 푸는 쪽을 택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가 이룬 제국은 조각난 매듭처럼 분열되고 말았으니 신화가 끝나도 뒷얘기는 남아 역사에 우연이 없음을 알려주니 참으로 알 수 없는 게 인간사(人間事)이다.

 

영웅의 깃발 아래 모여드는 사람들

스티븐 스필버그의 <인디아나 존스>에서 주인공인 고고학자 인디아나 존스로 분한 해리슨 포드는 자신 앞에서 현란한 칼솜씨를 보이며 덤벼드는 적을 한참 노려보더니 총을 꺼내 쏜다. 상대는 풀썩 쓰러진다. 매듭보다 강한 것은 칼이요 칼보다 강한 것은 총이다. 영웅에겐 이런 칼과 총이 있다. 상대를 향해 칼을 내리칠 때나 방아쇠를 당길 때는 주저하지 않는다. 주저하는 짧은 순간이 선 자와 쓰러진 자를 가른다. 영웅은 생각이 짧아도 행동은 과감하다. 영웅은 온돌이 아니라 냉방을 견디는 의지에서 정신의 근력을 다진다. 땅덩어리가 큰 중국역사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매우 발달했다. 주전 8세기부터 3세기까지 형성된 춘추전국시대에는 100여 개의 제후국이 있어 군웅할거(群雄割據) 국면이었으나 강국의 약국 병합으로 인해 조, 제, 위, 한, 연, 초, 진의 7웅이 서로를 견제했다. 절대강자가 없어 영웅들이 활약하던 전국시대는 결국 절대강자의 출현으로 중국최초의 통일역사가 전개되었다. 진의 시황제가 그 사람이다. 삼국시대에는 조조와 유비와 손권이 천하를 나누었고 그들 주변에도 숱한 영웅들이 주군을 달리 하고 용맹을 다투었다. 조조가 절대강자로 삼국을 통일했다.

원운동 중인 물체에는 원의 중심 방향으로 움직여 원운동을 유지하려는 구심력(centripetal force)과 크기는 같지만 반대 방향으로 멀어지려는 원심력(centrifugal force)이 있다. 지구가 우주공간으로 사라지지 않고 제자리에 떠 있을 수 있음도 구심력과 원심력이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영웅에겐 군중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정신적 매력이 있다.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군중 곁으로 갈 수 있는 접착력도 충분하다. 군중 곁에 다가가는 지도자와 군중을 끌어들이는 지도자는 친화적이고 카리스마적인 유형으로 설명될 수 있다. 영웅은 군중을 동원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는 정신적 자기력이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펄럭이는 깃발 주위로 사람이 모이듯 그렇게 영웅에게는 사람이 모인다. 유비와 조조에게는 영웅호걸들이 모여들었다.

 

진정한 영웅과 유사 영웅의 차이

진정한 영웅이란 제 자리를 지키는 지도자다. 항상 군중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자신과 군중이 속해 있는 거대공동체가 존립토록 한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이 붐비는 시장이나 거리를 찾지 않았다. 그는 유대 광야에 외롭게 은거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로 운집했다. 영웅의 향취가 군중의 발걸음을 옮기게 했던 것이다. 주님에게는 이런 영적 리더십이 탁월하셨다. 그분이 공적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수많은 군중이 그를 추종했다. 군중이 멀리 있을 때는 찾아다녔지만 군중이 몰려들 때면 자리를 피하셨다. 주님은 군중의 지도자 되기를 원치 않으셨다. 사탄의 제안도 거부하고 임금 삼으려는 군중의 의도도 뿌리친 채 무소의 뿔처럼 묵묵히 외로운 영웅의 길을 가셨다.

유사 영웅들이 도처에서 만들어진다. 사상과 이념적 대립상황에서 급조된 영웅은 노사분쟁을 겪으며 분신자살이나 투신자살로 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중단되어야 할 과격행위다. 단식농성이나 삭발투쟁은 정치가나 종교인들의 단골 메뉴다. 목사들이 교권싸움의 과정에서 머리를 깎는 장면을 보면 울화가 치민다. 메스껍고 부끄럽다. 삭발하려면 개종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스님들이 삭발염의(削髮染衣)라 하여 머리 깎고 물들인 옷을 걸쳐 사람들의 눈에 쉽게 드러나게 함은 스스로의 행동을 자제하고 잘못에 대해서는 세상의 질책을 받기 위함이다. 목사가 삭발함은 그런 수도정진의 자세를 갖겠다는 의미인가? 스포츠 세계에서 간혹 전의를 다진다든지 필승의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삭발하는 것은 그래도 보아 넘길 만하다. 정치가들도 투쟁과 농성의 수단으로 삭발이나 금식을 한다. 평소에 영양섭취를 잘 해서 그런지 몰라도 정치가들은 금식도 잘 견디는 편이다. 금식한 김에 정치를 접고 수도원으로 잠적하든지 삭발한 김에 면벽수행을 하는 편이 아예 나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다 삭발을 해도 목사의 삭발에는 거부감이 일어난다. 정 뭔가 대중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싶으면 삭발 아닌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한다. 군중은 말이 없어도 오래 전부터 식상해있다.

 

만난(萬難)의 시대는 영웅을 길러내

영웅은 만들어지지 않고 태어난다. 모태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품에서 태어난다. 영웅은 바닷가의 매끄러운 자갈처럼 억겁을 두고 파도에 씻겨 부딪히며 마모되어 얻은 모습이다. 한국의 동해와 서해 그리고 남해에는 옹돌 해변이 많이 있다. 옹돌 해변에서 파도가 밀려왔다 쓸려가는 소리는 맑고 깨끗하다. 그와 같은 매끄러운 모습과 청아한 음색을 내기까지 그 숱한 부딪힘 속에 살이 깎여나가고 본상이 뒤틀리고 파이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다. 쇠뭉치를 갈아 바늘을 만드는 철저마침(鐵杵磨針)이나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드는 마부위침(磨斧爲針)의 고사는 자기를 철저히 해부하고 버린 자가 얻는 득도에 다름 아니다. 옹돌을 보면 만난(萬難)의 역경을 딛고 역사의 얽힌 고리를 푼 영웅들이 떠오른다.

한국의 삼국인 고구려, 백제, 신라는 그 전후 시대에 비해 영웅들이 많았다. 고구려에는 연개소문이, 백제에는 계백이, 신라에는 김유신이 나라의 간성 역할을 했다. 결국 삼한일통의 대의를 이룬 것은 신라의 김유신과 태종무열왕이 된 김춘추였다. 신라 대신 고구려가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루었다면, 그래서 광개토대왕의 말발굽이 스쳐 지난 간 곳만 수복했더라면 조국의 형편은 지금보다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역사에는 “만일”이 있을 수 없지만 아쉬운 마음만은 지울 길이 없다. 영웅이 사라진 현대는 영웅을 원한다. 대한제국 이후에 조국에는 영웅이 흔치 않았다. 나라를 빼앗긴 암울한 역사의 현장에서 모두 나라의 독립을 위한 별떨기가 되어 스러지고 말았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영웅부재의 현실을 살아가며 헐리웃이 만들어낸 람보, 터미네이터, 록키에게 박수를 보내는 이 시대야말로 한 세기 전의 인물인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말처럼 불행하기 짝이 없다. 극작가로서 성공을 거둔 베르히트는 무정부주의자로 출발했으나 사회주의자의 발자국을 남겼다.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 망명길을 택했으나 매카시즘의 등쌀에 다시 동독을 선택했다. 거기서도 인민을 버린 정부를 비판하는 풍자시를 쓰며 한탄으로 세월을 보내다 58세의 이른 나이로 절명했다. 그가 남긴 말 중에 내 가슴을 두드리는 것은 “영웅 없는 시대는 불행하지만 영웅을 요구하는 시대는 더욱 불행하다.”는 통찰력이다.

 

아이들의 일그러진 영웅들

오늘 한국 사회는 어른들을 위한 영웅은 없어도 아이들을 위한 영웅은 무수하다. 아이들의 영웅은 플루타크가 열거한 영웅들이 아니다. 성웅 이순신도, 열사 이준도 아니다. ‘아이들’의 영웅은 ‘아이돌’이다. 아이돌이란 원래 우상을 뜻한 헬라어 이데인(idein)에서 나왔고 이돌레(idole)를 거쳐 영어 아이돌(idol)로 정착되었다. 한국의 십대들에게 아이돌은 대개가 유명연예인들이다. 가수, 탤런트, 영화배우 등이다. 시류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지만 적어도 인생전반의 관점에서 아이들을 위해 바람직한 영웅 창조에 어른들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아이들의 아이돌이었던 가수와 인기연예인들이 항성처럼 끝없이 반짝일 줄 알았는데 별똥별이 되어 사라지고 있다. 각종 비리와 음란 퇴폐 행위에 연루되어 그들의 도를 넘긴 일탈이 드러날 때마다 대중은 분노하고 아이들은 충격에 휩싸인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창조적인 영웅상을 심어놓지 못했으니 스스로 창조한 우상에 미쳐 날뛰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우상은 그럴듯하게 보여도 생명이 없다. 그것이 우상의 본질이다. 현대판 우상타파자(iconoclast)가 나와야 한다. 우상은 거짓 하나님이다. 거짓 신성함으로 대중의 존경과 사랑을 찬탈한 세력이다. 17세기 밀턴은 <우상타파론>(Eikonoklastes)에서 순교자와 성자로 치장된 사자(死者) 찰스1세의 이미지를 때려 부수었다.

 

조작된 영웅은 대표적인 우상

우상타파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사야를 통해 들려주신 뚜렷한 말씀이다. “또 너희가 너희 조각한 우상에 입힌 은과 부어 만든 우상에 올린 금을 더럽게 하여 불결한 물건을 던짐 같이 던지며 이르기를 나가라 하리라.”(사 30:22) 때로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준 물건이 우상으로 화하기도 한다. 광야에서 불평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불뱀에 물려 죽어갈 때 하나님은 장대 끝에 달린 구리로 만든 뱀을 걸어 그것을 쳐다보아 살게 하였다. 그 후로 이 놋뱀은 신성시되었다. 약 500간 신성시되었던 느후스단을 히스기야 왕은 놋쇠 조각으로 만들어진 우상으로 간주하여 부숴버렸다. 기독교에서는 가톨릭과 달리 성화와 성물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인간이 빠지기 쉬운 우상 심리 때문이다. 조작된 영웅은 대표적인 우상이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이문열이 1987년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한병태와 엄석대와 새 담임선생의 삼각구도 속에서 권력과 독재, 비리와 개혁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시골의 초등학교라는 좁은 공간에 한정시켜 재미있게 다룬 풍자소설이다. 한병태가 30년 전을 회상하며 스토리가 전개된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좌천으로 병태는 서울의 명문학교에서 시골의 초등학교로 전학 간다. 병태는 주먹이면 주먹, 공부면 공부, 소위 학교짱이었던 석대의 권력에 저항한다. 그로 인한 대가로 병태는 불량아로 낙인찍히고 집단 속에서 소외된다. 견디지 못한 병태는 모든 저항을 포기한다. 굴복에 대한 보상은 보호와 특별대우였다. 새 담임선생이 부임하면서 석대가 그때까지 부정행위로 전교1등을 유지한 사실이 드러나고 그간의 비행이 밝혀져 석대의 아성은 붕괴된다. 어른이 된 병태는 어느 날 피서 길에서 경찰에 붙들려가는 석대를 우연히 본다. 어렸을 때 아이들의 영웅이었던 석대는 일그러진 영웅이었다. 내게 있어 일그러진 영웅은 석대에게 복종하며 안락을 즐겼던 영태와 급우들이었다. 진실이 드러나면 우리의 영웅이 일그러지고, 저항을 포기하면 영웅인 내 자신이 일그러진다.

2010년 문학동네에서 펴낸 미하일 레르몬토프의 <우리 시대의 영웅>은 영웅을 그리지 않은 소설이다. 결투로 입은 치명상 때문에 27살의 나이로 요절한 그는 19세기 러시아의 천재작가로 평가된다. 그가 남긴 유일한 장편소설에는 제목과 달리 그 어떤 영웅도 등장하지 않는다. 시인적 발상일까? 악덕과 위선으로 꽉 찬 속물주의자인 페초린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반어적 투영일까? 아니면 당시 러시아의 왜곡된 영웅관을 고발한 것일까? 어떤 경우에도 그의 소설은 풍자적이다. 우리의 이문열과 달리 페초린이 영웅의 초상이라면 너무 일그러졌다.

 

삶에 충실한 영웅은 오래 버티는 자

한국의 민도가 위험수준에 도달했다. 이념과 사상이 조작해낸 현대판 가짜영웅들의 신변잡기가 신화로 꾸며진다. 유토피아의 상실에 상심한 현대인은 반대급부로 디스토피아에 이상하리만치 열광한다. 이상증세다. 현실을 초극하는 영웅이 없다면 현실을 가장 현실답게 살아내는 생활인이 영웅이다. 모두가 한 목소리로 “예스!”를 합창할 때 “아니오!”의 불협화음을 던질 수 있는 존재! 권력의 거친 대양을 횡단하는 소시민적인 인생항해! 현실세계에서 만능해결사로서의 배트맨은 없다. 삶에 충실함이 영웅 됨이다. 지금 한국사회의 난점은 영웅 아닌 사이비 지도자들의 낯 뜨거운 여론몰이다. 민족적 재앙을 불러들일 가짜에 열광하는 소수자들의 처참한 미래가 두렵고 행동 없이 가슴 치며 한숨짓는 다수의 무관심이 가슴 아프다.

누군가 내게 “영웅은 누구인가?”를 묻지 않고 “무엇이 영웅인가?”를 묻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답하겠다. “영웅이란 오래 버티는 것이다.” 영웅(Hero)을 영어로 뒤에서 읽으면 oreH 곧 “오래H”가 된다. 공사현장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철골구조인 H빔은 최소한의 재료를 사용하여 최대한으로 휘어짐을 막아주기에 인기가 높다. H는 이 짧은 글에서 “버팀”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Hero”를 뒤집은 “oreH”는 “오래 버팀”을 뜻한다. 20세기에 가장 많이 팔린 과자 이름이 오레오(Oreo)란다. 가수 티아라가 한국의 월드컵 축구 16강을 기원하여 불렀던 응원가 <We Are The One>은 “오레오레오레오”로 시작해서 “오레오레오레오”로 끝난다.

 

사이비 영웅의 시대는 독재국가나 전체주의로 변질

영웅주의는 사이비 영웅을 낳는 산실이다. 국가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 조국애를 내세워 국민들을 영웅주의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는 점이다. 지도자를 신격화하는 것은 독재국가나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흔하다. 이념과 사상이 뒤범벅된 조국에는 사실과 신화가 뒤섞여 있다. 우매한 군중을 일깨우는 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지성인들의 도덕적 책무다. 거짓을 밝히고 역사의 왜곡된 기술(記述)을 바로잡아야 나라의 기강이 선다. 교계에서도 서로 영웅상을 세우고 그 상에 금칠을 하듯 금력으로 자리를 사고파는 망동(妄動)이 그치지를 않는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식 영웅전이다.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긴 해도 수백 년간을 혜성처럼 나타났다 항성처럼 제 빛을 뿌리다 유성처럼 사라져간 그들의 모습은 영웅의 프로필이다. 바람처럼 왔다 바람처럼 사라져간 그들의 일진광풍 같은 삶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던 이스라엘을 구원하기에 충분했다. 그들에게는 하늘의 부름이 있었고 역사의식이 있었으며, 고난 받는 군중이 있었고 피를 흘리며 상대한 강적이 버티고 있었다. 350~450년으로 추정되는 이 기간에 나타난 영웅들은 삼손을 마지막으로 보면 13명, 엘리와 사무엘까지 포함시키면 15명에 이른다. 엘리는 예외이지만 삼손의 비장한 죽음으로 마감되는 사사기의 영웅들이 지닌 공통점은 그들이 시대의 구원자로 활약했고 속박 속에 있던 군중들을 해방시켰으며 강적들을 여지없이 궤멸시켰다는 사실이다. 사사기의 마지막 구절은 영웅이 나타나고 사라지던 혼돈의 시기를 짤막하게 서술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 영웅 없는 영웅시대, 지금이야말로 모두가 제멋대로 사는 바로 그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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