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26) 오래있음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D.Min.),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물고기가 미끼를 건드리면 찌가 움직인다. 이때 낚싯대를 들어 물고기를 잡는다.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다. 찌가 움직이는 모습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찌가 빠른 속도로 치솟을 때가 있는 반면 느리게 움직이기도 한다.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악감정을 품게 하였을 때 두 사도는 곧장 낚싯대를 접지 않는다. 그들을 좌절시키는 방해는 분명히 아니었다. 진행 상황은 비시디아 안디옥과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그들은 상당한 시간을 보낸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반대와 부정적인 반응에 부딪힐 때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을 위해 살며 어떤 것이 우선인지를 생각하는 게 첫째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뜸을 두고 생각하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두 사도가 이고니온에 오래 있었다는 것은 마냥 흘러가는 크로노스를 보냈다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시간을 두고 생각하고 기도하고 사역의 방향을 골몰했다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대로 시대가 도래하기도 하고 지속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은 하나님의 것이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또한 시간의 주인이시다(비교. 사 41:21 이하; 45:1 이하; 스 1:1-2).

바울과 바나바는 선교사역에 난관에 부딪히고 믿지 않는 자들의 방해와 적대감이 있다고 그 지역을 곧장 등을 돌리지 않았다. 하나님의 시간을 본 것이다. 하나님의 때를 바라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막 위에 구름기둥이 움직일 때까지처럼 하나님이 떠나라는 지시가 있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있어야 했다. 만일 하나님의 지시가 없었는데 떠나거나 포기하는 것은 불순종과 다름없다.

 

1.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비문에 의하면 그리스도교 신앙이 널리 퍼져서 이고니온은 이후 소아시아에서 그리스도교의 주요 중심지의 하나가 되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불순종하는 자들의 선동과 악감정을 품게 된 것에 단념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 있기를 택한다. 오래 머문다. ‘오래 있어’에 해당하는 ‘ἱκάνων χρόνων’(히카논 크로논)이다. ‘오래 있었다’라는 것은 오랜 시간, 즉 충분한 시간을 가졌다는 말이다. ‘오래 있어’는 두 사람의 시간 관리다. 시간 관리란 무엇인가. 우리는 시간을 관리할 수 있는가. 일주일은 168시간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168시간이다. 우리가 관리하는 건 그 시간 안에서 선택하는 활동뿐이다. 성경은 시간의 추상적인 연속성을 강조하지 않고 오히려 역사의 특정한 순간들에 하나님이 부여하신 취지를 강조한다. 이 시간관은 고대 세계에 통상적인 순환적인 시간관과 대조하여 ‘직선적’ 시간관이라고 칭할 수 있다. 하나님의 목적은 절정을 향해 나아간다. 하나님은 시간들을 정하심에 있어 주권적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개인의 생명의 시간에까지 미친다(시 31:15).

크로노스(Kronos)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Zeus의 아버지다. 아내 레아를 통해 태어날 아들(제우스)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받는 신이다. 신약에서 크로노스는 ‘시간의 폭’을 나타낸다(비교. 행 1:21). 이 기간은 일정치 않을 수도 있다(고전 16:7). 기간(행 19:22), 때(마 2:7, 16), ‘정해진 시간’(행 1:7), ‘기회’(계 2:21), ‘기한’(눅 1:57), ‘시점’(행 1:6) 등으로 사용된다. 두 사람은 막연한 시간을 두고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정해놓고 머무는 것을 뜻한다. 대체로 크로노스는 시간의 길이(요 5:6), 상당히 오랜 시간(행 14:3), 시간의 전 기간(20:18)을 나타내지만, 가끔은 시간의 한 시점을 가리키기도 한다(행 7:17). 두 선교사는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고 위협을 당하였을 때 오랜 크로노스를 두고 생각하고 신중하게 행동했다는 뜻일 것이다.

고대 그리스어에는 시간, 때를 나타내는 두 가지 말이 있다. ‘χρόνος’(크로노스)와 ‘καιρός’(카이로스)다. 전자는 과거-현재-미래로 연속해 흘러가는 객관적·정량적 시간이다. 후자는 인간의 목적의식이 개입된 주관적·정성적 시간이다. 적절한 때, 결정적 순간, 기회라는 뜻이다. 전자는 시간이 지닌 의미로 규정되며, 후자는 시간의 단순한 길이를 가리킨다. 라틴어로 전자는 ‘아에타스(aetas), 후자는 ‘템푸스(tempus)’다. ‘아에타스’는 양적이며 객관적인 시간이다. 시계와 달력이 알려주는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아에테스’안에서 사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사색할 여유가 없다.

NIV는 ‘spent considerable time’, 즉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고 번역한다. 바울과 바나바는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자신을 맡기지 않았다. 떠날 것인가 아니면 머물 것인가 하는 기로에서 오래 머물기로 정했다. Franciscus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주여, 제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하게 해주시고, 제가 할 수 없는 건 체념할 줄 아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자신의 내면을 사색할 여유가 없는 아에테스 시간이 아닌 충분한 시간을 가졌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오래 있음의 반대어는 조급함이다. 조급함은 집착을, 집착은 배타심을 낳고 배타심은 종종 공격적인 양태로 표출된다. 조급함은, ‘누울 자리 파악’에 비유하면, 자기 역량과 외부 환경, 그리고 지속 가능성에 대해 대충 파악하고 넘어가려는 안이함이다. 심히 걱정스러운 접근 방식이다. 조급함은 쉽사리 급조로 이어지고 결국 조잡이나 조악, 실패로 낙착되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며 살아간다

바울과 바나바는 부정적인 피드백에 흥분하거나 사역을 포기하지 않고 충분한 시간을 갖는 뜻이다.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키지 않고 여유를 갖고 행동하였다. 불순종하는 자들의 움직임에 여유를 갖고 행동한 것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다윗이 반지 세공사(細工師)에게 준 지혜로운 숙제를 떠올린다. “나를 위한 반지를 만들되 내가 승리를 거두고 기쁠 때에 교만하지 않게 하고, 내가 절망과 시련에 처했을 때엔 용기를 주는 글귀를 넣어라.” 세공사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찾아갔고 이 말을 받아 반지에 새긴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 오래 있게 만든 이유 중 하나는 핍박으로 보인다. 대핍박은 아니지만 아무튼 회당에서 불순종하는 유대인들의 난동으로 그곳을 당장 떠나지 않고 좀더 시간을 두고 있게 하였다. 만약 바울이 반대로 선교를 단념했다면 더 이상 말을 할 의욕도 없을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항로(李恒老·1792~1868)가 말했다. “공부함에 있어 가장 두려운 것은 오래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오래 견딜 수 없다면 아주 작은 일조차 해낼 수가 없다(爲學最怕不能耐久, 不能耐久, 小事做不得).” Albert Einstein이 한 말이다.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 문제를 발생시킨 당시에 갖고 있던 사고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문제란 뭔가. 우리가 어떤 종류의 장애에 부딪혔을 때의 상황이다. 우리가 속한 조직의 주변에서는 늘 장애가 생긴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다(고전 13:4). ‘오래 참고’에 해당하는 ‘μακροθυμεω’(마카로뒤메오)은 오랜 고난에 대해 ‘참다, 기다리다’의 의미다. 신약성경에서 명사형 ‘μακροθυμία’(마카로뒤미아)의 가장 일반적인 동어어는 ‘ὑπομονή’(휘포모네)로서 고통과 절망 가운데서 꿋꿋이 견디어 나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이 단어들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반응을 의미한다. 어쩔 수 없어서 참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요셉이나 다니엘처럼 환경이 척박하고 처한 상황이 어려워도 더 열심히 일하고 행동하는 적극적인 삶을 가리켜 ‘마카로뒤미아’ 또는 ‘휘포모네’라고 한다.

출범 25주년을 맞은 교보생명 '광화문글판' 가운데 시민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글귀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에서 가져온 문안인 것으로 나타났다. 글판에 전문(全文)을 새길 만큼 시가 짧다. 석 줄이다. 이 시는 2012년 봄편에 개재되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첫눈에 반하지 않으면 사랑도 아니라는 세태를 나무라듯 자세히 오래 들여다보라고 타이른다. 두 선교사는 오래 눈을 감은 것이 아니라 오래 생각했을 것이고 기도했을 것이다. 하버드대 의대의 이 연구는 1938년부터 10대 남성 두 그룹 724명의 인생을 추적해왔다. 80대가 돼서도 건강한 것은 50세 때의 콜레스테롤 수치와 상관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악감정을 품고 벗어나지 못하면 행복과 건강 모두를 잃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학교수들은 2018년 한 해의 사자성어로 ‘임중도원(任重道遠)’을 뽑았다. 논어 태백편에 나오는 증자의 가르침(사불가이불홍의 임중이도원·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으로 ‘등에 진 짐은 무겁고 길은 머니 선비는 모름지기 도량이 넓고 굳세지 않으면 헤쳐 나가기 어렵다’는 뜻이다. ‘갈 길이 멀다.’ 이 뜻을 담은 사자성어는 임중도원 외에 ‘일모도원(日暮途遠, 해는 저무는데 갈 길은 멀다)’이 있다. 둘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그 온도와 속도는 다르다. 전자는 “(부지런하되)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의 숙성의 여유가 담겨 있다. 먼 길이기에 페이스 조절이 중요하다는 숨은 의미가 있다. 후자는 “빨리, 서둘러” 하며 속성의 뜨거운 재촉이 깔려 있다.

두 사도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당장 그 자리를 피하거나 문제를 회피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 오래 있는다. 그릇된 증거를 바로 잡아 주고 참된 증거를 하면서 주를 힘입어 담대하게 말했다. 주께서, 즉 예수님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여 주시므로 복음에 대한 고상한 정의를 증거하게 하셨다. 표적과 기사라는 댓귀가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이 예언의 성취에 대한 것이고(참고. 행 2:19) 바로 예수님의 예언(참고. 2:22)이나 초대교회의 예언(참고. 행 2:43; 4:30; 5:12; 6:8; 7:36)과 같은 것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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