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수 장로 “선교에 꿈을 꾸고 기도하니 하나님이 길을 열어”

미얀마로 이어진 선교의 길에서 만난 ‘김대수 장로’

인터뷰에 앞서 상심리교회(예장 통합, 담임 한종환 목사)로 이어지는 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늘마음교회라는 애칭을 가진 상심리(上心里)리교회로 가는 길은 양평을 지나는 국도 6호선을 따라 국수역 맞은 편 대심리로 들어가는 작은 도로로 이어진 길이다. 그것이 상심리교회를 통해 첫 번째 만나게 되는 길이다. 약 2Km 정도의 작은 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좌우에 예쁜 전원주택들을 지나는데 멀리 남한강 물길이 보일 무렵 예쁜 십자가 탑과 너른 마당이 있는 상심리교회를 만나게 된다. 상심리교회 마당에 서면 두 번째 길을 만날 수 있다. 그 길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세곡운반선이 다니던 남한강 물길이다. 이어서 교회의 과거의 역사 속에 세 번째 길을 발견한다. 그것은 한국선교초기 복음을 전하던 선교의 길이다. 그 길 초입에서 상심리교회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상심리교회에 또 다른 길은 도시와 농촌을 잇는 길이다. 네 번째 길인 셈이다. 상심리교회를 가다보면 어떻게 이런 외딴 곳에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을까? 호기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교회 곳곳을 살피다보면 4대 까지 이어지는 신앙의 공동체를 보며 다음세대와도 이어진 믿음의 길을 만난다. 이전 세대와 미래 세대를 잇는 그 다섯 번째 길도 칭찬할 만하다. 하지만 오늘은 상심리교회로 이어지는 여섯 번째 길을 만나기 위해 상심리교회를 찾았다. 교회에 도착해서 예배당에서 잠시 기도 한 후 김대수 장로님과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하늘마음을 품은 상심리교회(예장 통합, 담임 한종환 목사)

 

김대수 장로[상심리교회 장로, 식물심리연구소 소장, 농학박사, 강원대학교대학원강사, 사)한국맨토교육협회 강사, 재)세미원 강사)

 

Q1. 먼저 장로님의 신앙의 배경인 상심리교회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없는데, 상심리교회는 양평 지역의 어머니교회라고 알려졌다. 상심리교회의 역사를 소개할 수 있나?

A. 상심리교회는 남한강변을 중심으로 서울과 강원도 지역을 잇는 물길 때문에 나루터가 있던 동네에 세워진 교회다. 오래 전에는 꽤 북적이던 나루터였다. 1900년대 초 김희수라는 참판이 이 동네에 내려와 이 지역 땅을 관리하면서 소작인들을 두었다. 그리고 특별히 3명의 청지기를 두었다. 그러던 1903년. 안국동교회 박응용이라는 권서인(勸書人)에 의해서 성경을 전해 받은 청지기들에 의해 자발적인 예배 모임과 사랑방교회가 형성된 것이다. 그들은 밤마다 모여 말씀을 읽고 기도를 했다. 당시 그들의 모임은 동네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불러 올 정도로 신기한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참판에 의해 제지를 받았지만 이런 와중에 알렌 클라크 선교사(곽안련 선교사)가 이곳 찾아오게 되었고 그의 <한국에서의 첫 열매> 보고서에 상심리교회가 보고되었다.

외국인 선교사나 외부 도움 없이 1905년에 사랑방교회로 출발한 교회는 1910년에 첫 번째 당회를 열게 됐고, 그 이후 우리교회는 양평 일대 뿐만 아니라 구리와 용문에 까지 복음의 모판과 같은 역할을 감당했다. 술과 여흥이 가득했던 나루터가 있던 지역이 경건한 분위기로 변해갔고 인근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교회가 됐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우리교회(상심리교회)는 어머니교회”라는 말을 자주 듣고 자랐다.

 

Q2. 김대수 장로님이 상심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배경은 어떻게 되나? 특별한 신앙의 체험이 있다면 무엇인가?

A. 나는 할머니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할머니를 기준으로 내가 3대 째이고 내 아이들이 4대 째다. 기억나는 것은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글짓기를 했는데 나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던 기억이 난다. 친구들에게 나는 ‘예수 믿는 아이’였다. 지금 나와 함께 시무장로로 섬기는 홍성은 장로도 내 사촌이면서 어릴 때부터 둘도 없는 단짝이고 신앙의 동료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성경공부를 하면서부터였다. 신약의 예수님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분이셨는데, 그 분이 역사 속에 오셨다는 사실이 그렇게 놀랍고 은혜로 다가왔다. 이성적으로도 믿음이 분명해지니까 늘 성경을 가지고 다니며 읽었다. 자연스럽게 전도도 했다.

한 번은 군대를 갔다가 첫 휴가를 나왔는데 이웃동네 사는 한 친구에게 밤을 꼬박 새워 복음을 전해 예수를 믿게 하고, 우리교회를 함께 다니다가 나중에 그 친구도 군종사병이 되었다. 이후 그 친구가 기독교잡지사에서 일하다가 낙심해서 신앙생활을 포기했는데, 하나님은 그 친구를 위해서 기도를 하게 했다. ‘하나님은 얼마를 기도하면 들어주실까?’ 하면서 한번 기도할 때마다 바를 정(正)를 써가면서 간절히 기도했다. 두 달 쯤 지났을 때 쯤 그 친구에게 편지가 왔다. “나, 다시 예수를 믿겠다. 앞으로 절대로 흔들리지 않겠다”고 했다. 그 친구가 그 후 얼마나 많은 전도를 했던지 전도한 사람이 400명 쯤 되었다. 그 일 후부터 기도의 능력을 더욱 믿게 됐고, 기도하면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됐다.

Q3. 상심리교회를 보니 도시와 농촌을 잇는 교량 역할, 어른 세대와 젊은 세대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하는 교회, 하나님 나라와 세상을 잇는 교량 역할을 하는 교회로 보였다. 상심리교회가 과거 40여명에서 지금의 400여명으로 부흥한 동력은 무엇인가?

A. 먼저 하나님의 은혜이다. 물론 이 지역에 전원주택들이 들어오고 활성화 된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한종환 담임목사님의 말씀이 참 은혜롭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정착한 성도들이 많다. 뿐만 아니라 우리교회는 유아들 엄마들에게 아이들을 잘 돌본다는 소문이 났다. 내 아내가 유치부 아이들을 잘 돌보는 달란트가 있다. 처음에는 얼마 안 되는 유치부 아이들이었지만 이 아이들을 잘 돌봤다. 그 유치부 아이 중 어떤 엄마가 자기 아이가 잘 돌봐지는 것을 보고 친구 엄마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년 동안 봉사하다가 유아학과를 전공하고 유치원을 하는 조카가 아이들을 돌보던 것이다.

그러다가 한 10여 년 전부터 우리나라 유아교육 분야에서 유명한 중앙대학교 유아교육과 교수님 내외가 우리 교회를 다니면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주일 어린이 예배 전에 미리 와서 영어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자 이것이 또 좋은 소문이 나서 아이들이 몰렸다. 실제로 아이들의 영어 실력도 향상이 되었고, 이 아이들이 신앙으로도 잘 양육 받아 젊은 세대를 이루어 지금 약 100여명의 교회학교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Q4. 상심리교회가 해외선교도 활발히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교회의 선교이야기와 특별히 장로님께서 힘을 쏟는 미얀마 선교 이야기를 말 해 줄 수 있는가?

A. 우리교회가 해외에 세운 교회가 8곳이다. 사실 대부분의 선교지에 교회를 지어 준 후 특별히 관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곳 현지인들이 자립하기 위해서다. 선교는 선교지의 눈높이에 맞춰서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주민 선교는 좋은 대안이라고 생각을 한다. 여기서 사람을 양육하고 다시 본국으로 돌려보내서 그들이 선교하게 하는 것이다.

미얀마 선교는 1996년~1997년 양평군 농업기술센타 근무할 당시 때 아시아연합신학대학에 농업개발과정 개설됐다. 외국에 선교지에서 리더십을 갖춘 평신도들 중에 농업기술을 익히면 좋을 만한 사람들을 한국의 큰 교회에서 후원을 해서 그들을 1년 과정으로 가르친 것이다.

초기에는 4개국에서 4명이 왔다. 그들을 농촌현장에 견학을 시키며 농업기술을 가르쳐주는데, 그 사람들이 무척 기뻐하는 것을 보고 앞으로 퇴직 후에 농업선교봉사를 해야겠다는 꿈을 갖게 됐다. 그 꿈을 위해서 기도도 하면서 영어도 공부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퇴직하면 농업선교를 하겠다는 꿈을 말했다. 그 꿈을 위해서 일찍 퇴직을 하겠다는 포부도 생겼다. 그래서 그랬는지 하나님께서 나를 43살이라는 아주 이른 나이에 사무관으로 진급케 했다. 사무관으로 10년을 일하다가 서기관이 되고 이후 소장이 되어서 일찍 퇴직을 하게 됐다. 이후 농업기술센타에서 10여년 근무할 때 축적된 자료를 통해 박사논문을 쓰고 학위도 받게 됐다.

 

Q5. 농업기술센타 소장으로 있으면서 하나님이 선교의 꿈을 갖게 할 계기를 만들어 주셨는데, 그렇다면 그 꿈이 어떻게 현실화 됐나?

A. 박사학위를 받으니까 농업진흥청에서 KOPIA(코피아-해외농업기술개발사업) 사업으로 미얀마 코피아센터 소장으로 가 달라는 요청을 받고 미얀마를 가게 된 것이다. 여기서도 하나님이 개입하신 은혜가 크다. 사실 미얀마는 전에 농업기술센터 근무 당시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농업개발과정으로 온 분이 미얀마 현지에서 목회하는 목사님이었는데 그 분이 꼭 미얀마로 와서 도와달라고 요청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구체화되지 않았는데 훗날 그 부탁대로 하나님이 나의 길을 미얀마로 이끄신 것이다.

하나님은 미얀마에서 나를 도울 현지인들도 미리 준비시켰다. 미얀마 현지인 중 한국에 외국인근로자로 파견된 ‘난다’라는 이름의 친구가 부천 실로암교회(담임 이명재 목사)에서 신앙 훈련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난다가 미얀마에서 나의 통역관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난다를 만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섭리였다. 미얀마로 돌아간 난다는 앞서 내 선임인 미얀마 코피아 소장 밑에서 통역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어려움을 겪자 이전에 한국에서 믿었던 신앙을 회상하며 다시 새벽기도를 시작했고, 그 기도 끝에 나를 새로운 신임 소장으로 만난 것이다. 나 역시 미얀마를 가기 전에 통역관과 운전사를 전도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었다.

미얀마는 전도가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믿는 것을 막지는 않는다. 난다는 나와 내 아내가 드리는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고, 이후 난다 아내도 함께 예배를 드렸으며, 운전하는 직원과 관리직원도 예배에 동참했다. 내가 미얀마를 떠난 후에도 난다 집에서 예배가 계속됐다.

난다는 꿈을 키웠다. 미얀마에 유치원을 짓고 싶다는 꿈이다. 나는 난다를 지도자로 세우기 위해서 농기계를 하나 사서 보냈다. 난다도 농기계를 사서 그 운영 수입의 십분의 일을 교회를 세우는 일에 사용하고 있다. 나는 난다 한 사람을 통해서 미얀마에 큰 선교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으며 기도하고 있다.

 

Q6. 장로님은 부친도 장로님으로 지금까지 한 교회를 변함없이 섬겨왔는데, 가정의 신앙적인 가훈이나 부친 장로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은 무엇인가?

A. 내 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에게 믿음, 정직, 성실을 귀가 따가울 정도로 강조하셨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 모두 믿음, 정직, 성실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간다.

Q7.장로님 좋아하시는 말씀과 찬송가는 무엇인가?

A. 내가 좋아하는 말씀은 마태복음 6:33이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은 나의 기도가 먼저 하나님 나라에 있도록 해주셨다. 항상 그것들을 먼저 기도했고,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구하는 대로 응답해 주셨다.

또 하나의 좋아하는 말씀은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는 말씀을 좋아한다. 이기적인 유전자를 가진 인간이 떠드는 평화에는 답이 없고 오직 예수님 밖에 답이 없다고 확신한다. 찬송가는 438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를 애창한다.

 

Q8. 장로님의 특별한 기도제목은?

A. 하나님께서 요즘 더욱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하게 한다. 나라와 민족 그리고 한국교회가 어려움 앞에 있는데 나는 이것이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회개할 기회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교회가 바로 서는 때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와 사회 곳곳에 서 있는 곳에서 바른 역할을 하는 것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대부분은 선교를 위한 기도에 집중하고 있다.

 

Q9. 젊은 세대 즉, 다음 세대 신앙인들에게 남겨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A. 단 한가지다. 젊은 세대들에게 하고 싶은 권면은 예수를 아는 것이다. 잠언이나 전도서의 말씀처럼 젊은이들이 죽음에 대해서 깊이 깨달으면, 죽음의 날을 준비하게 되고 인생이 풍성해진다. 청년의 때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여호와를 두려워 섬기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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