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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철 목사 연재】 숨통을 틔워라 (1)

한명철 목사 기자   기사승인 2019.10.04  11: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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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바벨탑 언어 혼돈과 오순절 방언의 역사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기 전의 우주는 혼돈 자체였다. 혼돈은 모든 것이 섞여 제 자리를 잡지 못함이다. 창조는 창조주의 의지로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잡음이다. 성령의 바람 한 번 휘몰아치시니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잡고 질서와 조화를 이루었다. 바벨은 인간에게서 일치와 화합의 상징이었던 하나의 언어를 분산시켰다. 세계를 하나로 묶었던 언어가 세상을 나누는 암기가 되었다. 흩어지기를 면하려는 인간의 결집 의지는 흩어져 땅에 충만하며 번성하라 하셨던 하나님의 창조 명령을 거스르는 일이었다. 탐욕과 자기 과시가 인간의 천부적 재능에 섞여 비뚤어진 문명이 태어났다. 홍수의 대재앙이 혼잡하게 뒤섞인 세상을 일소(一掃)했지만 인간은 홍수 이전의 세상으로 역행하려는 시도를 했다. 바벨탑 사건은 역행의 구체화였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야기된 언어의 혼잡은 세상에 새로운 혼돈을 가져왔다. 혼돈의 영인 사탄은 끓는 가마솥으로 변해버린 세상에 온갖 잡동사니를 불러들였다. 새 세계의 질서가 되어 오신 주님은 이 거대한 혼돈의 괴수 레비아단과 베히못과 더불어 싸우셨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했던 성령강림은 혼잡한 언어를 하나로 묶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마치 불의 혀와 같이 갈라지는 성령의 형체가 각 사람의 머리 위에 머물렀다. 지상의 방언들이 아닌 하나의 다른 방언이 터져 나왔다. 들리기는 각자의 방언으로 들렸다. 하나님이 일순간 천상의 언어로 지상의 언어들을 다듬으셨다. 이로 인해 영적 혼돈의 먹구름은 거두어지고 새로운 구원의 질서가 정립되었다. 물론 그 기초를 이룬 것은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란 양대 축이었다.

 

혼돈과 분열을 이기는 성령의 능력

사탄은 기민한 혼란의 영들을 세계 곳곳에 심었다. 하나님의 질서가 확립된 곳을 골라가며 혼란의 마수를 뻗쳤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심긴 배신의 영, 일곱 중의 하나인 니골라를 덮쳤던 배도의 영, 율법시대에서 복음시대로 전환되는 과도기에 예루살렘교회를 괴롭혔던 현안들, 초기교회의 여린 싹을 뭉개버리려던 영지주의의 혼란, 기독교신학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전의 혼란기를 틈타 교회를 공격하던 각종 이단의 세력들은 사탄이 공들여 쌓은 혼란의 성채들이었다. 하나님은 혼란의 시기를 잠재울 자신의 종들을 예비하여 수습하셨다. 맛디아, 스데반, 바울, 야고보, 요한, 교부들이 그 역할을 잘 감당했다.

사탄의 흉계는 기독교의 황금시기를 거쳐 중세의 암흑기를 거치며 다양한 방도로 교회를 혼란의 와중에 빠트려 자멸하게끔 무던히 애썼다. 역시 하나님은 수도원 운동과 개혁자들의 신앙의지로 맞불을 놓으셨다. 희생은 컸지만 언제나 혼란을 망가뜨리는 것은 질서의 영이신 성령이셨다. 지금은 혼란의 영이 가장 극성을 부리는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인 시기다. 이런 종말의 때에 사탄은 대혼란의 영으로 극성을 부리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영은 절대적 조화와 질서의 능력으로 이를 넉넉히 분쇄하신다. 법궤 앞에 고꾸라지는 것은 늘 다곤이다. 성령에게 옴짝달싹 못하는 것은 항상 악령이다. 그리스도에게 무릎 꿇는 이는 언제나 적그리스도다.

 

성령의 능력을 잃은 박제된 기독교

구한말의 혼란기에 작은 빛으로 들어와 조선을 밝힌 것은 복음이었다. 망국의 한을 달래며 국권 수복의 의지를 불태운 것도 복음에 기초한 기독교정신이었다. 일제의 탄압에 맞서 독립을 외치며 의로운 싸움을 싸웠던 이들은 십자가의 복음으로 갓 무장한 민초들이었다. 당시의 기독교는 조선의 희망이었다. 한국기독교라 통칭되는 오늘날의 모습과는 퍽 대조적이었다. 지금의 조국교회는 그리스도의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남았다. 예수의 몸이 빠져나간 수의처럼 한쪽에 개켜져 있는 것이 생명의 능력을 상실한 현대한국교회의 자화상이다. 전통은 살았으나 열조의 정신은 사라졌고 형식은 철골보다 단단한 구조이지만 잃어버린 법궤의 내용물처럼 속이 비었다.

전통과 획일적 틀에 박제된 기독교에는 근원적인 생기가 사라졌다. 교회는 부를 쌓고 힘을 지녔지만 교회를 진정 교회되게 하는 성령의 능력을 잃어버렸다. 예수의 이름을 연호하지만 그 이름이 지닌 원래의 권세와 능력, 은혜와 축복, 기적과 영광은 냄새조차 맡을 수 없다. 세상의 나그네 되어 살아야 할 순례공동체는 나그네임을 한사코 부인하며 주인 행세를 하려 한다. 세상의 임금이 누군지 알면서도 하늘의 시민보다 땅의 시민이기를 고집하는 것은 영혼에 주입된 탐욕의 기운 때문이다. 이들에게 하늘나라는 단지 환상일 뿐 실체가 아니다. 그들은 세상의 임금이 제공하는 영예와 부를 즐기며 왕중왕이신 그리스도의 통치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일시적인 왕국에 도리어 거침돌이 될 뿐이다.

 

기득권의 오만함에 왜곡된 교회

교회가 세상 설득에 실패하는 이유는 자신이 먼저 말씀에 설복당하기를 거부해서다. 세상은 교회의 그럴듯한 구호나 설교 투의 우격다짐으로 설득되지 않는다. 들으면 다행이지만 안 들으면 본인들만 손해라는 식의 고자세는 메시지의 좋고 나쁨을 떠나 세상의 차가운 냉대를 받기 십상이다. 교회의 오만함과 고집스러움은 세상에 접근하려는 많은 시도를 무위로 돌려버렸지만 교회는 지난 역사의 쓰라린 실패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다. 그만큼 교회의 오만방자함이 극에 달했다는 증좌다. 교회는 왜곡된 상을 바로 잡을 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자만심을 버리지 못하고 구태의연함을 고집해 신뢰를 잃었다. 세상의 지탄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세상의 귀는 이미 많이 닫혀졌다. 세상은 빈자의 친구로 오셔서 창기와 세리의 친구가 되셨으며 민중들의 애환을 한 몸에 짊어지셨던 예수에 익숙하다.

오늘의 교회는 예수의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가난한 자의 친구이기보다 부자의 동무가 되어왔다. 소외계층보다는 기득권층과 두터운 교분을 쌓으면서 과체중의 예수를 선보였다. 교회재벌, 선교재벌이란 별칭이 가당키나 한가? 부끄럽고 괜스레 화가 난다. 교회도 얼마든지 적정선의 행복과 삶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지나친 것이 문제다. 잔고에 쌓여가는 ‘영’의 행진은 결코 달갑게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쌓을 만하면 이내 허물어지고 그래서 늘 허덕이는 부족 속에 풍요로운 나눔을 실천하는 신비스런 행보에서 교회의 자족이 보여야 한다. ‘억’ 소리 나는 것도 시시해서 수백억과 수천억의 숫자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있으니 두려운 일 아닌가!

 

독선적이고 무례한 기독교

양보를 비웃고 이득 챙기기에 재빠른 상업적 기독교의 추태는 역사적 기독교가 공유해왔던 고귀한 유산을 폄하시키고 말았다. 힘을 가진 자로서의 부적절한 망동에 치를 떨며 울분을 토했던 우리의 지난 시절인데 어느새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는 중세의 기막힌 전철을 밟아가고 있으니 이를 어이하란 말인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겹겹이 도금을 하면서 거대한 황금송아지 상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제 세상은 이런 교회를 우습게 여긴다. 교회의 독선에 가까운 확신을 믿지 않는다. 어떤 말로도 설득되지 않는다. 물론 천사의 말도 예외는 아니다. 교회는 예수를 살아 보임으로서만 세상을 설득할 수 있다. 이것이 마지막 희망이다.

교회의 병증은 유독 부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교회의 근본 자세가 막돼먹었다. 예의범절에 익숙했던 유교문화권의 한국교회는 이상하리만치 무례하다. 불신자들에게 무례하며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무례하다. 심지어 하나님에게까지 무례하다. 일반적으로 성도들이 주의 종들을 대하는 태도는 일반의 존경을 훨씬 넘어섰으나 그들을 대하는 성직자들의 태도는 지금까지 무례했다. 강단문화는 그 전형적인 예다. 반말과 쌍욕이 할렐루야와 아멘에 섞여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엄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에 있어 저질의 만담과 억지웃음을 유도해내는 작태는 가히 엽기적 수준이다.

 

무시(無視)와 하대(下待)를 일삼는 거만한 목사들

목회자들의 세계는 어떠한가? 말을 올리는 것인지 내리는 것인지 묘하게 말끝을 흐리면서 눈치껏 잽싸게 야자타임을 시도한다. 대개가 작은 목회를 하는 이들이 아니다. 백이면 백, 조금 목회가 된다 싶으면 말본새부터 달라지니 이런 지도자 밑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가까운 사이라서 자연스럽게 말을 트고 지내는 것이라면 얼마나 정겹고 편안한 일인가! 처음 본 상대인데도 하대(下待) 조로 나오고 악수할 때 손아귀를 완전히 넉넉하게 잡기도 전에 손가락을 꽉 쥐어버린다. 악력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지만 난 그럴 때마다 그러려니 하고 상대의 손에 잡혀준다. 보나마나 인격적 사귐을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다.

왜들 이러나? 싶다. 목회 환경이 괜찮고 마음의 여유로움이 생기면 오히려 어른들은 물론이고 힘겨워 하는 동료 후배들을 감싸주고 위로함이 예수 사랑까지는 아니라 해도 인지상정이 아니가! 손해 볼 것도 없고 그리 힘든 일도 아닌데 말이다. 필자는 어려운 길에 들어선 동료로서 여전히 후배들을 존경한다. 웬만해서는 하대하지 않는다. 모르는 사이일수록 반드시 깍듯이 대한다. 정말 오랜 친구처럼 가까워지지 않으면 말을 트지 않는다. 상대가 진심으로 원하거나 친밀 관계가 어느 단계에 이르면 서로 불편하지 않기 위해 자연스럽게 말을 내린다. 물론 말 내림이 상대를 무시함은 아니다. 정겨움의 표시로 그리 한다.

 

웃기고 울리는 것이 영성의 표식(標式)인가?

대통령을 무릎 꿇게 만든 것을 무슨 승전가처럼 읊어대던 정신 나간 목회자의 비속함에서 역겨움을 느꼈던 것은 비위가 약해서였을까? 목사의 권위가 그럴 만큼 대단한 것인가? 무례하기 짝이 없다. 꿇으라고 꿇을 마음도 없으면서 꿇지 않았을 때의 여파를 재빠르게 계산하고 꿇은 장본인 역시 우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겸손한 기도의 무릎 꿇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꿇은 자도, 꿇게 한 자도 수백 만 그리스도인들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7천5백만 모두를 무시했다. 안하무인격인 해당 목사의 처사가 역겨웠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는 주변인들의 모습은 더욱 가관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목사이기에 은혜를 베풀고 사랑을 나누기 전에 먼저 무례함의 굴레에서 벗어나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과 태도를 키워야 한다.

웃기고 울리는 것을 영성의 표식으로 여기는 한심한 말쟁이들과 그들의 굿거리에 화답하는 우매한 신자들의 무분별도 심각하다. 말이 막히면 아멘이고 분위기를 일신하려면 할렐루야를 남발한다. 아멘으로 화답지 않으면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으니 무턱대고 여기저기서 아멘이 개구리의 합창처럼 들려온다. 자칭 말씀의 종들은 적당히 말씀을 인용하고 예수의 이름을 들먹이며 청중의 영혼이 아니라 자신들의 구미를 위한 굿판을 벌인다. 소위 말씀성회, 능력집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막말잔치를 벌이는 그들에게서는 영혼을 위해 구로하는 진정성이 전혀 엿보이지 않는다. 이는 신성모독이다. 마지막 날에 자신의 입으로 내뱉은 말들에 의해 심판받을 일을 생각하면 섬뜩하다. 예의는 거룩함에서 나온다. 말씀을 선포하는 자는 어릿광대가 아니다. 진지함을 잃어버리면 말씀의 생명과 진리가 나를 버린다.

 

영혼에게 잠시 쉼을 주는 설교

숨은 쉼을 요한다. 숨을 잠시 쉬는 것이 휴식이다. 숨이 긴장의 연속이라면 쉼은 이완이다. 이완 없는 긴장은 끊어지고 폭발한다. 기타 줄은 그래서 끊어지고 풍선도 그렇게 터진다. 쉬어야 한다. 쉬어도 적당히 쉬어야 한다. 쉼은 적당해야 숨에 이롭다. 숨의 쉼이 길면 숨이 멎는다. 살아 있음의 묘미는 숨과 쉼의 절묘한 배합에 있다. 복식호흡은 날숨과 들숨이 최고의 긴장과 이완선상에서 이루는 호흡의 한 경지다. 숨의 특징은 쉴 새 없이 들락거림이다. 숨을 인위적으로 멈출 때 우리는 ‘참는다’고 한다. 물속에 전신을 담그고 몇 분이나 숨을 참는다. 물속에서 숨을 오래 참는 사람을 가리켜 ‘숨이 길다’고 표현한다.

가파도에 사는 해녀를 소재로 만든 영화 <숨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의 숨소리>가 제2회 북경국제영화제(2012년 4월 21~28일)에 초청됐다. 류상수 감독이 3년간 가파도에 머물며 완성한 영화다. 물질하는 해녀의 숨비 소리는 저승문턱을 드나드는 소리다. 숨 가쁘나 숨 가쁘게 들리지 않고 애잔함과 생명의 끈질김이 감동으로 저며 드는 소리다. 호흡을 가리켜 ‘숨 쉰다’고 한다. 들락날락 숨을 쉼은 가만히 있는 쉼과도 비슷하다. 쉼은 정지 상태가 아니다. 무수한 운동의 입자들이 존재의 수면에 엎드려 있음이다. 숨을 잠시 쉼은 숨을 계속 쉬기 위함이다. 설교는 영혼에게 잠시 쉼을 주는 영적 예술이다.

 

들숨과 날숨으로 소통의 숨을 틔우라

장자는 “발꿈치로 숨을 쉬면 신선이 된다.”며 그다운 표현을 남겼다. 머리카락으로 하늘을 날면 천사가 된다는 말과 별로 다르지 않다. 코로 숨 쉬며 호흡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의 헐떡임은 하루살이의 숨결과 다르지 않다. 숨은 저절로 쉬는 것 같지만 인간이 태아 적부터 수중호흡을 익힌 결과다. 검도는 백번 연습하면 저절로 터득한다(百練自得)지만 삶은 그렇지 않다. 천만 번을 연습해도 삶은 여전히 힘들다. 알을 깨고 나온 새는 저절로 날지 못한다. 수없이 나는 연습을 반복한 끝에 창공을 나는 한 마리 새가 된다. 이를 조삭비(鳥數飛)라 한다. 날기를 본능처럼 반복하는 새도 나는 법을 쉼 없이 연습하여 비상을 이룬다면, 호흡에서의 숨과 쉼을 반복하여 숨통을 틔움은 강한 생명의 원리다.

우리 사회의 사면팔방이 꽉 막힌 듯해서 나라가 아예 숨통 막힐 지경이다. 탈출로를 봉쇄당한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인데 희망 잃은 군중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면 땅이 갈라진다. 언로가 막히면 통치자와 국민간의 소통이 막혀 국가적인 기도 막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어떤 이유에서든 기도가 막히면 하임리히법(Heimlich maneuver)이나 기관절개술(tracheotomy)을 통해 숨길을 틔어주어야 한다. 죽지 않으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영적 상태로 표현한다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대화가 단절되어 기도가 막힐 지경이 되면 응당 회개의 충격요법으로 기도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망하지 않으려면 언로를 트게 해야 한다. 관제(官制) 언론의 철갑을 벗어버리고 정론직필(正論直筆)의 기치를 드높여야 한다. 권력에 마비된 자가 우둔하지 군중은 결코 우매하지 않다. 막히면 뚫고자 군중은 거리로 뛰쳐나온다. 물길이 막히면 산이 무너지고 땅도 꺼진다. 숨 막혀 죽지 않으려면 숨통을 틔어주어야 한다. 숨이 막혀 헐떡이는 조국의 숨통을 누가 틔어 줄 것인가!

한명철 목사 jesuspointer@naver.com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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