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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칼럼】 우상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름답다

이승희 목사 기자   기사승인 2019.10.08  16:2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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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28) 우상(偶像)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D.Min.),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우상은 하나님 대신 섬기려는 탐심

구약의 선지자들과 시인들은 지속적으로 우상은 단순한 나무나 돌, 인간의 수공품에 불과하다가 신랄하게 공격한다. 그러한 경우에 그들의 수사학적 한계는 때로는 마치 전장에서 상대 적장에게 퍼붓는 조롱을 연상케 한다(사 57:13; 비교. 왕상 18:27).

성경에서 명하는 ‘우상’은 가시적인 신상이 아니라 하나님 대신 섬기는 탐심이라 할 수 있다(골 3:5).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기보다 우상을 하나님 자리에 올려놨다. 생존과 번영, 탐욕을 가져다주는 주체자로서 하나님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우상을 만든 ‘동기’ 속에 믿음의 본질이 담겨 있다. 우상은 마치 오이 밭의 허수아비와 같이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한다(렘 10:5). 이사야는 제사를 위해 쓸모없는 우상을 실어 날라야 하는 피곤한 짐승을 동정하면서 그들을 비웃은 적도 있다(사 46:1). 이사야처럼 바울은 우상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의 가르침을 강화하고 확대시킨다. 우상들은 비실재하는 것들이며 위험한 영적 잠재력을 지닌 존재들이라는 인식을 같이한다.

바울과 바나바는 나면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을 보고 자신들이 현인신(顯人神)으로 여기고 제사하겠다고 덤벼드는 루스드라 사람들을 보고 기겁을 한다. 옷을 찢는다. 무리 가운데 뛰어들어가 소리를 지른다. 사람들을 납득시키려 한다. 루스드라 사람들의 대다수가 유대인들의 역사나 그 성경을 알고 있었거나 또는 아테네 철학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1. 우상은 헛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그들이 하나님을 ‘숭배의 대상’으로 생각했다면 이집트의 태양신인 ‘호루스(Horus)’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풍요와 번영을 주는 신으로 인식했기에 ‘아피스(Apis)’, 즉 성우(聖牛)로 만들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했다(출32:4). 루스드라 사람들은 소가 아닌 사람을 신으로 여기고 숭배하고자 하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루스드라 사람들은 문화적으로 Greco-Roman 문명과는 차단된 벽지에 사는 농민들이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렇듯이 전혀 그 문명의 혜택을 못 받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릇된 우상을 맹신하듯 그릇된 생각을 무작정 믿기를 잘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네 개의 ‘마음의 우상’를 믿기 때문이라고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말했다. 그는 인식의 왜곡이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그리고 ‘극장의 우상’이라는 네 가지 우상 숭배에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우상들은 인간 그 자체에서 오기도 하고, 인간의 정신적 활동으로 얻어진 지식이나 이론에 의해서 오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두 번째가 ‘동굴의 우상’이다. 사람들마다 진실을 이해하는 능력이며 방법이 다르다. 그리고 자기 마음의 ‘동굴’ 속에 갇혀서 제각기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본다.

사도행전에는 순전히 이방인만으로 구성된 청중에게 행해진 설교의 요약문이 두 편 실려 있다. 본문은 그 중의 하나이다. 또 다른 하나는 바울이 아덴의 아레오바고에서 행한 설교의 요약문이다(17:22 이하). 15절의 메시지는 바울이 유대 회당과 그런 믿음에 영향을 받지 않는 청중들에게 제시되는 사도행전의 첫 번째 진술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에 해당하는 δεον ζόντα‘데온 존타’는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로 읽을 수 있다. 특히 하나님을 죽은 우상과 비교할 때 자주 나타난다. 시편 84:2에서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해당하는 ‘אלחי’(엘 하이)이다. 그리스도교와 천주교 십계명이 다른 부분은 두 번째와 아홉 번째 그리고 열 번째 계명이다. 나머지는 다 똑같다. 전자는 두 번째 계명에서 '우상 숭배 금지'를 꼽고 있다. 후자는 '우상 금지'가 빠진 대신에 전자에서는 열 번째 계명에 함께 묶인 '이웃의 아내'와 '이웃의 재물'을 각각 아홉 번째와 열 번째 계명으로 나누고 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신화라는 프레임으로 기적을 이해하고 제사를 행동으로 옮기고자 하였다. 반면 바울은 복음이라는 프레임으로 기적을 설명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한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요 왕이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왔다는 것이 좋은 소식, 즉 복음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었다. 바울과 바나바를 신이나 천사가 아니라 예수님이 보낸 사자, 즉 선교사들이다. 그들은 신화나 철학을 말하는 떠돌이 이야기꾼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한 구속에 관한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기 위해 보냄을 받았다.

 

2. 우상을 버리고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바울은 성경의 종교에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었던 정보로 시작함으로써 증거한다. 그의 접근은 주 하나님이 이교도의 신들과 구분되며, 그는 만물의 창조자이심을 지적한다. 우리는 바울의 복음 전도에 대한 접근법이 지니고 있는 유연성에 주목하게 된다. 그는 어디에 가든지 어떤 대상이든 메시지에는 변치 않는 한 가지가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좋은 소식, 즉 유앙겔리온이 포함되어 있다.

우상숭배(idolatry)는 하나님의 진노와 시기를 격발시키는 ‘no-god’, 즉 무신에 대한 예배이다. 우상과 우상숭배는 헛된 소망을 일으키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들의 선언과 마찬가지로 무가치한 것이다.

신화란 좋은 소식과 구별되는 허구적인 이야기다. 바울은 신화에 근거하여 사람을 신격화하고 숭배하는 일를 ‘헛된 일’이라고 규정한다. ‘헛된, 허무’로 번역되는 히브리어의 기본적인 의미 가운데는 ‘공허함, 쓸모 없음, 무의미함’이란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세 개의 히브리 단어 가운데 예레미야 2:5에서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에 있는 ‘헛된’에 해당하는 ‘הֲבֵ֥ל’(헤벨)은 시편, 잠언, 전도서, 예레미야에서 인간 노력의 무익함을 나타낸다. 무의미하게 행하는 것과 허탄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욥 27:12). 비유적으로 헤벨은 실체가 없는,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개념이다. 즉 ‘우상의 허무함’과 같은 개념을 전달한다(렘 10:15; 51:18). 성경에서는 우상이란 신상 자체가 아니라 탐심을 실현하기 위한 ‘동기’를 우상으로 정의한다. 제1∼3계명을 지키기 위해 제거해야 할 대상은 인근 사찰의 불상이나 마리아상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탐욕이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외쳐지는 위선적 행위들이야말로 우상숭배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우상들은 썩고 상하게 되고(겔 6:6) 전혀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인간의 특징들을 갖고 있다. 초인간이 아니라 인간 이하의 존재일 뿐이다(시 115:4-8). 신약도 구약의 내용을 반복한다(17:29; 롬 1:18-32).

‘헛된 일’에 해당하는 ‘mavtaio"’(마타이오스)는 구약성경의 개념이 신약성경과 LXX에서도 표현되었다. 명사형 ‘mataiovth"’(마타이오테스)는 행동을 언급한다. 지적 무가치나 어리석음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무가치나 어리석음도 포함된다. 이 헛됨이 함축하는 마음, 즉 마음의 깨달음에 내포되는 모든 것이다. 따라서 마음의 맹목과 부패에 관한 이어지는 구절들에 포함되는 것이 ‘허무’라는 단어에 내포되는 것이다. 마타이오테스는 어리석음을 뜻하는 ‘mavthn’(마텐)에서 왔다. ‘헛된, 공허한, 쓸데없는, 무가치한, 무익한’의 뜻이다. 우상을 묘사하는 방법으로 구약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이러한 예배는 헛된 것이다.

역사적 실재와 사실이 진정한 계시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신화는 전혀 종교적 가치가 없다. 무익하다. 따라서 신약성경은 신화가 역사(벧후 1:16)와 진리(딤후 4:4)에 대립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경륜과 참된 경건(딤전 1:4; 4:7)과 상반된다고 선언한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한다. 허탄한 신념에 착념한 사람들의 행동이다. 루스드라에는 유대인들이 적었기 때문에 바울의 전략은 보다 창조적이어야 했다. 이 특정 지역에 거하는 이방인들은 특히 신화에 뿌리가 있는 전설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교의 신들은 헛된 것이다(참조. 렘 2:5; 10:3 등). ‘헛된 것’의 동족어는 ‘헛된’이다. 문자적인 의미는 ‘힘이나 목적이 결여된’이다. 예수님은 이방인의 예배와 바리새인의 경건이 이렇다고 선언했다(마 6:7; 15:9; 막 7:7).

전설이 그들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였다. 전설이 주는 나쁜 선례를 따르지 않고자 행동했다. 나쁜 선례를 밟지 않고자 하는 본능적이 행동이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신화에 따른 나쁜 선례를 밟지 않고자 본능적으로 제물을 준비하여 제사를 드리려고 하였다. 두 사람이 정말 신이냐 아니냐를 검정하는 것은 다음 일이다. 일단 제사부터 지내므로 화근의 단초를 제공하지 않으려는 단체행동이 아닐 수 없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변론을 내는 신화’에 착념치 말라는 주의를 듣는다. 신화를 수식하는 표현이 대체로 ‘망령되고 허타한’(딤전 4:7), ‘귀가 가려워서 거짓 교사가 미혹하는 허탄한’(딤후 2:3-4),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결코 믿어서는 안 되는 ‘허탄한’ 이야기로(딛 1:4)로 묘사한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4에서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 즉 신화를 쫓는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신화에 대한 고전적인, 즉 Greco-Roman 의미와 완전히 일치한다. 신약성경에도 뮈토스를 이러한 뜻으로 사용한다.

신화는 유대주의와 영지주의의 혼합이 넌지시 암시되고 있다. 이런 헛된 이야기는 복음과 대조된다. 베드로는 신화를 공교히 만든 이야기로 규정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신화가 사실이 아니며, 아무런 종교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고 판단한다.

 

 

이승희 목사 titeioslee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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