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으로 내 시간을 채울때 하나님을 뜻을 깨닫는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담임, 본헤럴드대표, 변화산기도원협력목사, 서울신학대학교신학박사, 저서: 주기도문연구, 충성된 일꾼되어가기 등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고난이 없는 분들은 없다. 사도 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시험이나 고난이나 시련을 대하는 삶의 자세를 가르쳤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6:7).

‘시험’을 표준새번역에서는 ‘시련’으로 번역하고 있다. 시험, 시련, 고난, 환난은 동일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시련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잠깐 근심하게 한다는 것이다. 시험앞에서 오히려 ‘크게 기뻐’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어떤 시험이든지 모든 시험은 잠깐이다. 영원한 시험이나 시련은 없다. 그래서 시험앞에서는 항상 기뻐하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것이 시험을 극복하는 길이다.

 

"성도의 고난은 유익한 것"이다.

 

성도의 고난은 유익한 것이다. 왜냐하면 고난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 이것보다 의미 있고 행복한 일이 어디 있는가? 물질적인 축복을 손에 넣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일 것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면 그것은 인생에서 가장 큰 은총이다.

다윗은 고난의 유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 힘대로, 내 마음대로 행동하며 살았다. 고난이 찾아오면서 깊이 생각하게 된다.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이 찾아왔을까? 주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구나 깨닫게 된다. 그리고 다시 믿음을 붙들게 된다. 이것이 축복이다.

내 위에 형이 있었는데, 20살 초반에 결혼했다. 한 마디로 사고를 친 것이다. 아이를 둘을 낳고, 큰 아이 6살 때, 20대 중반의 어린 나이에 전기 사고로 사망했다. 사고를 당해 한 달간 병원 중환자실에 있었다. 그리고 한 달 정도 살고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때 사람의 생명이 참 질기 구나 생각했다.

고압에 온 몸의 신경 세포가 다 불에 타서 모든 것이 다 파괴되었지만 심장과 뇌만 살았다. 그런데, 대화가 가능했다. 형이 말하기를 나는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사고를 당했다. 그러나 너는 순종했으면 좋겠다. 라는 말을 남겼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 그래서 고난을 통과하는 것이 참으로 버겁지만, 결과적으로 신앙인들에게는 유익이 된다. 주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고, 삶의 의미를 다시 붙들기 때문이다.

 

"성도는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 동안 광야 길을 걷게 했다. 고난의 행군이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게 하신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신명기 8장 2절 이하에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교만한 마음을 꺽으셨다. 낮추셨다. 주리게 하셨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키는지 알고 싶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알고 싶어서 광야에서 시험을 주셨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간의 노력으로 인해 먹고 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공급하셨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이다.

고난이 때로는 괴롭지만, 그러나 신앙인들에게는 큰 유익이 된다. 고난을 통해서 인생이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다시 기억하기 때문이다. 고난의 찬 바람과 싸우며 말씀으로 내 시간을 채워갈 때,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 그 은혜는 참으로 값진 선물이다.

고난의 시간을 견디는 고전적인 방법이 있다. 오래전 가톨릭 수사들이 해온 기도 방법이다. 흔히 ‘네 가지 영적 독서’라는 방법이다. 이것을 ‘렉치오 디비나’로 부른다. 렉치오(성경을 읽는다), 메디타티오(성경을 묵상한다), 오라티오(성경으로 기도한다), 콘템플라티오(성경대로 산다)로 구성되어 있다.

시험을 이기는 길은 하늘의 양식으로 나를 채워가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다. 오직 말씀을 사랑하고 기도하며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면 고난이 부요함이 된다.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유다왕 중에 므낫세가 있다. 12세에 왕이 되어 55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므낫세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던 왕이다. 아버지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을 잘 섬겼고, 종교개혁을 했던 왕이다. 그러나 므낫세는 아버지의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지 못했다. 아버지가 헐어버렸던 우상 단지를 다시 세웠고, 바알 우상 단지에 절을 하며 경배를 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것을 없애고, 그 자리에 우상을 섬겼다.

하나님께서 므낫세와 백성들에게 말했지만 듣지 않았다. 하나님이 최후의 방법을 사용하셨다.앗수르 군대가 므낫세를 쳐서 사로잡고 쇠사슬에 묶여, 비참하게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그가 환란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대하33:12,13).

유다왕 므낫세는 포로가 되었다. 고난이 찾아온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고난앞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었다. 오직 하나님께 간구했다. 고난 앞에서 겸손을 회복했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서 므낫세의 기도와 간구를 받으셨다.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왕이 되었다. 고난을 통과하고 나서 므낫세의 고백이 참으로 우리들의 마음에 와 닿는다.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고난을 믿음으로 통과하면 하나님을 다시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긴다.

히브리서 12장 말씀에는 주께서 주시는 징계가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고 한다. 주께서는 사랑하는 자들을 징계도 하고 채찍질도 하신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대우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신다.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와 채찍질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생자가 아니요 친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징계를 하신다. 육신의 아버지는 자기 뜻대로 자식을 징계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징계를 하신다. 모든 채찍질과 징계는 나의 유익을 위해서이다.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참여자로 세우기 위해서이다. 징계를 받을 때에 잘 통과하면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히12:8-11)

시험이 크면, 고난이 크면, 하나님의 축복도 더 크다. 기대치가 크기 때문에 시험의 문제도 어려운 것이다. 사회적 특권을 부여하는 자리가 높을수록 시험 문제는 어렵다. 그러나 통과하고 나면, 사회적 대우도 특별한 것이다.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고난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다. 이것을 기억하면 고난을, 시험을 넉넉히 이길 수 있다. 고난은 고난을 일뿐이다. 시험은 시험을 일뿐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더 크다. 이 땅보다 하늘의 가치가 훨씬 더 귀하다. 사도 베드로는 시험이나 시련은 잠시 잠깐이며, 크게 기뻐하라고 한다. 이것이 진리이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