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개천절의 광화문과 닫힌 하늘의 막힌 땅

일렁이는 촛불과 출렁이는 태극기의 물결은 분열의 뼈아픈 현장이다. 서초동과 여의도 그리고 광화문으로 대별되는 농성 장소 역시 한동안 이 나라의 발목을 가로막을 부끄러운 공간이다. 이 나라가 열렸던 개천절에 우리에게 보인 것은 ‘닫힌 하늘과 막힌 땅’(閉天塞地)의 현실이었다. 닫힌 하늘을 열고 막힌 땅을 뚫어보고자 군중은 막힌 도로를 채우고 열린 마음으로 통치자의 큰 덕이 나라를 비추어야 할 광화문으로 집결했다. 집회를 통해 보여준 민심의 향배를 거들떠보지 않던 통치자는 국론 분열의 우려를 불식하며 예의 유체 이탈식 화법을 이어갔다. 그래서 6일 만인 한글날에 군중들은 같은 장소에 또 다시 모였다. 그날 유난히 외쳐졌던 한글은 수감, 퇴진 같은 음지의 언어였다. 하늘도 닫히고 땅도 막혔던 그날처럼 한글이 고문을 당하던 날이었다.

개천절의 집회와 달리 한글날의 집회는 외관상 덜 종교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대중을 아우른 시도라 보기엔 역부족이었고 적절하지 못했다. 양 집회를 통해 실시된 헌금과 관련된 논란은 득보다 실이 더 많다.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많은 댓글들에서 우호적이지 못한 내용들이 상당수 있었다. 웬 목사 연사들이 그렇게 많아야 하는지, 스님은 한 명이었고 신의 한 수를 대표한 신혜식도 한 명이었다. 여러 명이 등단해서 외친 메시지의 전달 능력이나 감동에서도 여러 명의 목사들이 한 스님과 한 대표를 능가하지 못했다. 집회 동원력에서 교회가 보여준 힘은 대단했지만 깔끔하게 진행되지 못한 연단에서의 모습은 껄끄럽게만 느껴졌다. 식상한 면면에 필자의 얼굴이 뜨뜻해졌다. 이 나라가 바로 세워지기까지 시간이 지체된다면 그것은 나서기 좋아하는 기독교 대표자들의 어설픈 행사 진행이다.

헌금은 하나님께 후원금은 정치인에게

개천절 헌금 시간에는 ‘가장 기쁜 시간’이란 언급과 함께 헌금함에 부착된 글귀 “본 헌금은 전광훈 목사님의 모든 사역을 위하여 드려지며, 헌금의 처분 권한을 전목사님께 모두 위임합니다.”의 내용이 시비의 빌미를 제공했다. 대형 집회를 위해 소요되는 경비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고 반대편들에게 시달려왔던 경험에 비추어 이런 시도를 백 번 이해하고 천 번 양보한다 해도 비난을 벗어날 길은 없다. 거두어진 모든 액수를 전 목사 개인의 사역을 위해 사용한다는 것도 용납할 수 없고 그런 용도라면 “헌금”이란 성스러운 명칭을 삭제해야 옳았다. 헌금을 빙자한 공개적 갈취 행위라 한들 해명할 방도가 별반 없다. 어리석은 일이다. 사람의 마음이 동하면 그런 외적 부추김이 없어도 거두어지는 것이 국민의 정성이다. 차라리 ‘애국 성금’이라 했던들 논란은 지금보다 수위가 낮아졌을 것이다.

재차 강조컨대 그것은 헌금이 아니다. 헌금은 그 어느 특정 인간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만 바쳐지는 물질이다. 그래서 거룩한 예배의 일부를 이룬다. 예배 도중에 진행된 일이니 문제없다는 식의 발언은 눈 감고 아웅 하는 식이다. 예배의 형식을 빌렸을 뿐이지 그날의 집회가 과연 하나님께 드려졌을까? 정치 후원과 연관된 정치 자금법 위반이 아니라는 선관위의 해석이 있고 종교 행사로 볼 경우에 기부금법에도 저촉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지만 기독교 내에서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음은 이 순서에 일말의 문제가 있다는 방증이다. 설교가 대중 선동의 수단으로 전락될 수 있고 헌금을 희화화시켰다는 측면에서 예배 형식의 집회 진행을 엄중히 비판하는 바다.

내용이 정당한 집회는 형식도 부끄럽지 말아야

집회의 알맹이는 조국 장관과 문재인 대통령에게 대다수 국민들의 뜻을 전달하려 함에 있지 않았던가? 왜 지엽적인 문제로 본질이 왜곡되는 상황을 연발시키는가? 현장에 모인 군중들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유튜브를 통해 그 장면을 시청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타 종교인이나 아예 종교를 갖지 않은 일반인들도 상당수 있었다. 얼마든지 곡해되고 반대파들에 의해 부풀려질 수 있는 모습이었다. 과격한 구호 선정도 께름칙한 부분이다. 전투적인 용어를 사용해 집회의 성격을 강화시키려 했을지라도 그것 역시 납득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구호 내용을 뒷받침할 만한 구체적 행동이 따르지 않는 자극적 투쟁 언어는 북한이 즐겨 사용하던 상투어가 아니었던가? 내용이 정당하면 형식도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이래저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집회였다.

서로 상대를 향해 날 선 공방을 이어가는 소위 보수와 진보의 언쟁에 핏발이 서려있다. 언제라도 폭력으로 돌변할 수 있는 긴장감도 팽팽하다. 이참에 차라리 뭔가 터져버려 나라의 진로가 명확히 정해졌으면 하는 바람도 솔직히 있다. 그런데 대다수가 원치 않으면서도 그럴 가능성에 가슴 조리는 이들을 생각하면 이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한 쪽은 옳고 다른 쪽은 그르다는 단순한 양비론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기에 누군가 균형자로 나서야 할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군중은 이럴 때 나부껴야할 지도자의 깃발을 보기 원하고 국민은 자신들의 손으로 뽑은 통치자의 태산 같은 의지를 느끼기 원한다. 진정 통치자에게 애국애민의 초심이 일말이라도 남아있다면 우국충정의 결단을 내려야하지 않을까? 누가 이 폭풍전야의 비상 상황을 돌파할 수 있겠는가? 정파의 이익이나 개인의 사상적 기울기를 떠나 민족의 운명을 고심하며 역사 앞에 솔직한 한 양심을 보기 원한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