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29) 지식(智識)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D.Min.),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직관(直觀)이 아닌 하나님의 영으로

9·11 테러 당시 Donald H. Rumsfeld 미 국방장관은 한 기자회견에서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것(Unknown unknowns)’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정보(아는 것)를 네 종류로 나누었다. ‘안다는 것을 아는 것’이란 데이터로 확인할 수 있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은 모르는 지표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바로 직관을, 그리고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탐색과 상상력의 영역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을 포함한 유대인이나 관리들이 안식일마다 외우는 선지자의 글을 통해 메시야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모르고,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이적을 보고서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지 못하는 것은 직관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지식은 영원하다. 이러한 즉각적이고 부단한 지식은 흔히 직관이라고 일컬어진다.

아인슈타인은 “새로운 아이디어는 갑자기, 어떻게 보면 직관적인 방식으로 찾아온다. 하지만 직관은 이전의 지적 경험의 결과물에 불과하다”고 했다. ‘직감이 뛰어나다’는 다른 말로 ‘눈치가 빠르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의 말과 몸짓을 읽어 그로부터 포착한 정보를 분류하는 능력이 높다는 의미다. 즉, 말과 몸짓 사이의 일치 또는 모순을 파악하는 직관이 상당한 것이다. 제자들이 왜 그런 직감 또는 눈치가 없었을까. 선지자들의 말은 하나님의 계시다. 예수님 역시 하나님의 하실 일을 말하였다. 계시는 인간의 지식과 직감으로 알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귀가 있어도, 눈으로 보아도, 손으로 만져 보아도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게 계시다. 하나님께서 그 눈을 열어주었을 때 볼 수 있고, 하나님께서 그 귀를 들을 수 있는 귀로 만들어 줄 때 하늘의 계시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영으로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성령께서 아신다(고전 2:11). 여기서 안다는 단어는 요한계시록 2:23, 즉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는 경우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정확하고 완전한 지식을 의미한다.

지식은 하나님의 행위를 인정하는 것이다(신 11:20). 야훼(הוהי)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신 4:39). 그의 이름을 존중하고, 그리고 그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사무엘상 2:12에 엘리의 아들들의 무지한 이유를 밝힌다. 그들이 ‘행실이 나빠’이다. 행실이 나쁘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자다. 물론 모르기 때문에 행하지 않겠지만 모두 그런게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다 알아야 행하는 것은 아니다.

1. 아는 것은 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이방인에게 전파된 이래로 지식은 단순한 인정을 넘어서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지식과 행위는 결합되어 있다. 로마서 1:21에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며...’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당연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아는 지식이 있는 자다. 이론적인 요소가 실천적인 요소를 배제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두 가지 지식이 있다. 하나는 알고 있다는 느낌은 있는데 설명할 수 없는 지식이다. 또 하나는 알고 있다는 확신에 더하여 남들에게 설명해 납득시킬 수 있는 지식이다. 자신이 제대로 알고 있음을 인지하는 것을 메타인지(meta-cognition)라고 한다. 메타인지가 우수한 학생과 그렇지 않는 학생은 기억해 내는 단어 개수는 비슷하다. 0.1%의 학생들이 월등한 것은 기억력 자체가 아니라, IQ가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얼마나 기억하고 못 하는지 파악하는 능력’이었다. 자신을 제대로 보는 눈이다. 예수님은 그런 눈을 갖고 제자들에게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고백 이 후 서너 차례 수난 예고를 했지만 제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도 몰랐고 안다고 하는 것도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었다.

고대의 세이렌은 여인의 머리와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새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세이렌의 노래는 어떤 것이었길래 그곳을 통과하는 사람이 모두 죽어 나간 것일까? 아마 그것은 노랫소리 그 자체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더 많은 것을 알아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유혹이었다. 그리스인들에게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들에게 안다는 것은 산다는 것이고, 산다는 것은 본다는 것이었다. 헬라 세계에서 지식에 해당하는 ‘γνῶσις’(그노시스)는 고요한 그리고 존재를 넘어선 상태의 실제에 대한 명상이었다. 이 단어의 일반적인 용법은 지적인 이해, 즉 지각하다, 이해하다, 알다를 가리킨다. 처음에는 아는 행위에 역점이 주어 졌다. 이러한 행위는 보고, 듣고, 조사하고, 경험하는 것과 같은 모든 방식의 지식이 포함된다. 사물들뿐만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지식도 포함된다. 지식의 ‘知’는 화살 시(矢)와 입 구(口)로 이뤄져 있다. 입에서 나온 말이 화살처럼 빨리 전파되는 것이 지식이라는 얘기다. 지구 반대편의 정보까지 순식간에 접하는 요즘이라면 과거 화살의 속도에 견줄 바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통찰을 중시함으로써 지식을 인정이나 순종적인 복종으로 보는 것에서 이러한 구약적인 관점은 더욱 분명히 나타난다. 히브리어에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히브리어의 핵심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임을 알 것이다. 구약 성경은 말이 아니라 행동을 요구한다. 아니, 말과 행동은 분리할 수 없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말씀은 곧 존재임을 알리며, 존재는 순종을 통해 생존한다.

John C. Maxwell이 쓴 ‘위대한 영향력’에 나오는 내용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식을 갖고 잠시 성공한다. 몇몇 사람은 행동을 갖고 조금 더 오래 성공한다. 소수의 사람들이 인격을 갖고 영원히 성공한다.” 지식과 스펙이 뛰어난 사람은 그것을 통해 경쟁력을 갖추고 사회로부터 인재라고 평가받길 원한다. 여기에 행동이 더해져야 한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유일한 길이다. 그것이 일류사회로 향하는 첩경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지식은 순종을 포함한다. 지식은 어떤 고정적인 소유물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특징 지우는 은혜의 선물이다. 이 속에는 항상 실천적인 관심이 함축되어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막대기 하나를 땅에 수직으로 꽂아 놓고 날마다 해가 정남쪽에 올 때 그림자 길이를 측정해 그림자가 가장 길어지는 날을 동지로 정하고, 그림자가 가장 짧아지는 날을 하지로 정했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이런 막대기를 사용했는데 ‘노몬’이라고 불렀다. 영어에서 지식이라는 뜻의 ‘knowledge’는 ‘k’가 묵음이어서 쓸데없는 글자처럼 느껴지지만 이 단어의 어원이 그리스의 ‘γνῶσις’(그노시스)이다. 그 어원이 그림자 길이를 재던 노몬에서 온 것이다. 당시 문명에서는 천문학이 지식을 대표했다는 말이다.

2.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경외

히브리어에서 지식에 해당하는 ‘דַּעַת’(다아트)는 알다를 뜻하는 ‘ידע’(야다)에서 유래한다. 다아트는 그노시스보다 폭넓은 의미를 지닌다. 정보의 요소가 강조될 수 있기는 하지만, 지식의 주체에 보다 많은 주의가 기울여진다. 또한 듣는 것은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들 배후에 있는 무시간적 원리들보다는, 오히려 사건들, 즉 하나님이나 인간들의 행위들이 이 지식의 실재를 이룬다.

인간이 과연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알 수 있다면 어느 정도나 알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철학과 신학에 동시에 격렬한 쟁점이었다. 신학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은 의심되거나 부정된 적이 없다. 오히려 신학자들의 관심은 하나님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성경을 읽을 때 순종을 위해 ‘들어야’하고, 교리적 선입관에 함몰되어 단어와 문맥을 간과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몸이 반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아내가 남편을 알 듯 경험과 관계를 통해 친밀한 사이가 되는 것’이다. 관계 맺지 않는 지식은 아는 것이 아니다.

문화권마다 ‘안다’는 개념은 다르다. 서양에선 고대 Greco-Roman 시대의 ‘안다’와 ‘나누기’가 같은 개념이었다. 예컨대 지리 용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 눈에는 그냥 ‘땅’으로 보이는 것이 지리를 아는 사람 머리에는 봉우리, 능선, 계곡, 오솔길 등 작은 단위로 ‘나뉘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지식에 관한 문제의 요지는 하나님의 전지하심(omniscience)이다. 전지하심에 해당하는 omniscience에 science가 들어 있다. ‘자르다’를 뜻하는 라틴어 scindere에서 왔다. 자연과 우주에 대한 진실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눌 줄 아는’ 능력에서 점차 ‘지식’으로, 이후 ‘과학’으로 의미가 바뀌었다. 영어로 ‘아무도 모른다(Nobody Knows)’는 ‘신만이 안다(God Knows)’와 유사한 표현으로 쓰인다. 종교 영역에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인에게 과학을 뜻하는 Science는 ‘세상을 잘라서 또는 세분해서 나눠 보는 것’, 즉 지식이라는 의미였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의 은혜, 능력 및 요구를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식을 단순한 정보나 신비적 사상으로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식을 사용할 때만 지식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의지의 작용 속에는 무지는 곧 죄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들었고 그래서 아는 것을 실행하지 않는, 들은 말씀대로 실행하지 않는 것이 죄다. 하나님의 전능, 완전하심, 복되심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언제나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같다(호 4:6). 마찬가지로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다(신 1:13). 하나님께 있어서 아는 것 곧 의지의 행사이기 때문에 어떤 대상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안다는 말 속에는 ‘선택하다’는 뉘앙스가 함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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