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국과 조국의 통치자가 남기는 것

조국 법무부 장관이 사퇴했다. 35일만이다. 짧지만 너무도 기나긴 시간들이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조국 사태’는 그의 물러섬으로 한시름 놓은 것 같아보여도 실제로 조국(祖國)은 더 큰 재앙에 직면하게 되었다. 차라리 임명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임명되자마자 자발적으로 사퇴했더라면 분열 직전의 한반도는 빠르고 극적인 회복세를 보였을는지 모른다. 그가 전면에 나서면서 당사자와 측근들, 반대와 우려를 외면하고 임명을 강행했던 통치자, 그리고 그들이 속한 집권정당에 대한 호불호가 더욱 선명해졌고 여론의 향배도 급변하기 시작했다. 편향적 시각의 언론 매체들이 앞 다투어 이를 다루었고 보란 듯이 편가르기와 힘겨루기가 이 나라 심장부에서 들썩였다. 이순신 장군의 대첩을 부끄럽게 만든 ‘서초 대첩’이란 참람한 명칭 오용에 단초를 제공한 개인의 권력 의지는 어찌 되었건 군중의 함성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유령 같은 화법으로 행성을 넘나들고 북쪽의 반응을 살피며 동서 외유를 일삼던 통치자는 뜬금없이 궁색한 입장을 표명했다. 국론 분열의 현장을 애써 무시하며 역주행을 일삼던 그가 국민 갈등 야기에 대한 송구함을 피력했으나 뒷북치는 격이다. 벼랑 끝에 선 듯한 나라의 위기를 애써 모른 체하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때늦은 표현이 과연 파열된 심장의 고통에서 응결된 피의 언어일까? 아니면 무색무취인 앵무새의 화법일까? 그에게는 국민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나라의 암울한 현실에 깊이 고민하는 절실함이 없다. 소위 친문 세력들은 조국영웅론을 외치며 균열이 간 둑에서 새어나온 상처받은 사상의 분노를 여과 없이 표출했다. 사면팔방에서 헐뜯고 저주하는 살풀이가 시작되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이웃은 보이지 않고 살벌한 눈빛들뿐이다. 어둠에 포박당한 영혼들은 실낱같은 빛의 번득임에도 이를 간다.

 

칼날 같은 시어에 베이는 민중의 가슴

칼과 풀의 싸움이란 시어로, 승냥이와 건장한 어깨의 인간으로 비유하며 조국 수호에 앞장섰던 안도현의 시어(詩語) 아닌 시어(屍語)는 뜨거운 연탄재가 되어 우호적인 독자들 머리 위로 쏟아졌다. 울분은 느닷없이 연탄재를 덮어쓴 군중의 몫이지 세치 혀끝과 언어 세공으로 군중을 우롱하는 이에게 속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칼이요 승냥이 떼며 풀이 죽었던 다수의 국민이 풀이다. 맹목적 좌충우돌의 공지영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며 울분을 토했지만 그녀의 가슴은 죽을 때까지 온전할 것이다. 찬반의 표현은 자유이지만 그들이 휘갈긴 언어에는 부정할 수 없는 살기가 감돌아 대중을 호도하기에 충분하였다. 침묵하면 비양심, 수구세력으로 치부되기에 덩달아 나팔을 불어대지만 진리와 생명 공감력이 없다. 대중의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하고 민족공동체의 생존능력을 저하시키는 왜곡된 감성 언어의 난무함을 경고한다.

마지막 판결까지 자리를 지키겠다던 그의 돌연한 뒷걸음질이 용퇴가 아님을 그 누구도 잘 안다. 개혁의 선봉장을 자임하던 그가 멸사봉공의 각오로 물러섰을까? 사방으로 옭죄어오는 칼끝을 견디기 어려워 마지못해 내린 자구책은 아닌가! 국론 분열의 기획에서 향도 역을 자임했던 그였기에 사방에서 호위 무사를 자처하던 세력들의 구심점이 사라진 이 시점에서 전국이 어수선하다. 여전히 갑론을박이고 시끌벅적하다. 한편에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다른 편에서는 분노의 함성을 내지른다. 다시 정치판에 뛰어들 가능성을 내비치는 이 해프닝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대선 후보로 거론된다는 이 황당한 현실에 시민정신의 자존심이 실종되었는가를 되뇌게 한다. 각계각층의 호전집단이 결사항전을 부르짖으며 조국 살리기에 격앙된 목소리를 내지르지만 건전한 이 나라의 풀뿌리 민중은 민족의 나아갈 길을 응시한다.

 

좌편향으로 기운 나라의 몸체를 세우라

망국의 길로 들어섰음에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우매한 군중이라 매도만 할 것이 아니다. 길라잡이 역할을 하지 못한 지도급 인사들이 먼저 군중 앞에 머리 숙여 사과할 일이다. 워낙 지독스러운 사상적 편향으로 인해 군중의 눈을 막고 귀를 흐리게 한 호도 세력을 발본색원해서 과감히 척결해야 한다. 바다와 하늘에서 언제 불벼락이 떨어질지 알지 못하는 현실을 인식하면서도 안전한 맹방과의 우의를 외면하고 망나니처럼 막 대하기만 하는 적대세력에게 추파를 던지는 이 미련한 구애공세를 어떡하면 중지시킬 수 있을까? 생존이 걸린 문제인데 적과의 은밀한 동침을 추구하는 파렴치한들을 언제까지 내버려둘 것인가? 국민을 하늘로 떠받들지 않고 짓밟아도 될 흙부스러기 정도로 생각하는 정치 무뢰배들을 퇴출시켜야 한다. 선거로 심판하려면 지금부터 군중의 태산 같은 저력을 과시해야 한다. 종 같은 지도자를 발굴해야 한다.

이 나라는 좌편으로 한참 기울어진 몸체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남북 간의 비밀 회동이 더 이상 묵과되어서는 곤란하다.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나라를 통째로 넘기지 말란 법도 없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일어나지 못할 일도 아니다.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다는 말이다. 유엔의 분위기는 최근의 북한 핵 도발에 규탄 일색인데 당사국인 한국만 침묵으로 일관한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직통전화는 가동 중인데 트럼프와 문재인의 직통전화는 계속 불통이니 상전벽해가 아닐 수 없다. 트럼프에게도 문제는 있지만 사면초가 상황을 자초한 것은 한국의 통치자와 그의 무능력한 총신(寵臣) 집단이다. 요상한 남북군사합의에 손발이 묶인 남한은 군사적 기거동작이 예전 같지 않아 불편한데 북한은 제멋대로의 행보를 지속한다. 그래도 입도 뻥긋하지 못하는 관계자들의 무능함과 뻔뻔스러움이 역겹기 짝이 없다. 이런 협정은 파기해야 옳다.

체재 경쟁을 비롯해 늘 국제사회에서 남한을 이기려 했던 북한의 비정상적 호승심은 억지스럽다. 평양에서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을 위한 남북 간의 축구대회가 열렸지만 북한은 무관중 상황에서 경기를 치렀다.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이상야릇한 경기에 임한 남한 선수들이 그 상황을 잘 버텼다고 생각한다. 남한에 비해 약체인 북한이 여러 골을 먹게 되었을 때 불편할 군중의 심기를 사전 차단하고 비기거나 이기면 녹화방영을 통해 얼마든지 체제 선전에 유리하게 활용키 위함이었다. 이런 나라는 금세 바뀌기 어렵다. 온갖 구애에도 지치지 않는 좌익 세력들은 한쪽으로 치우친 구호와 선전의 날갯짓으로 너무 멀리 갔다. 그들이 자유 시민을 늑탈할 날은 결코 오지 않는다. 그래서도 안 된다. 국제사회가 용인하지 않을 것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한반도 위에 널리 펴신 팔을 결코 거두지 않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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