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부지런한 종들도 나태에 물들어 갑니다.

문제는 매우 심각합니다. 거짓 종들은 거짓 영에게 휘둘리기에 자신이 거짓의 와중에 있는지조차 모릅니다. 자신이 거짓 영에게 휘둘리고 있음을 알면서 거짓의 종노릇할 이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의 아비를 향한 증오심이 식을 줄 모르고 거짓의 종노릇하는 이가 마냥 안타까울 뿐입니다. 현실적으로 동료의 거짓됨을 숨길 수도 없고 까발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괴롭습니다. 천의 얼굴, 만의 혀를 가진 거짓의 활갯짓으로 인해 찢어지고 상하는 공동체를 바라보며 다만 가슴 칠뿐입니다. 오늘 말이 나온 김에 강력히 요청합니다. 제거 1순위는 사실 저입니다. 거짓됨을 드러냄으로 들이닥칠 역풍이 두려워 침묵하는 비열함이 제게 있습니다. 피 흘리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받은바 은혜와 축복을 누리고 나눔에 많이 실패한 방증이지요. 지독한 배신의 아픔 하나 견디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는 제 한심한 모습에도 식상하셨지요?

나태할 수 없는 제가, 나태해선 안 되는 제가 한순간 나태에 빠졌으니 뭐라 추궁하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주님! 이 종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태한 종은 주님께서 나중 심판하실 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엄히 꾸짖으시겠지만 그들의 숫자도 위험수치를 이미 넘어섰습니다. 나태는 전염성이 강해서 부지런한 일군들까지 물들입니다. 나태한 종들은 자기들끼리 노는데 식상해 있습니다. 부지런한 일군들을 끌어들여 함께 놀기를 좋아합니다.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기에 깨어 의를 행하고 득죄치 말아야 하는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밀려나는 것은 소수의 선한 벗이요 착 달라붙는 것은 악한 동무들입니다. 아예 떼거리로 몰려듭니다. 그 여파로 말씀과 기도에 진력하던 종들도 시간과 횟수가 줄어들더니 이제는 가뭄에 콩 나듯 합니다.

 

주인 행세하는 종들로 종다운 종들이 밀려납니다.

주인 행세하는 종들을 보며 종다운 종들이 많이 약해집니다. 요즘 사람들은 그것을 양극화 현상이라 그럽니다. 주님을 내세워 일을 꾸미고 주님의 이름을 적시(適時)에 내세우는 데는 가히 천재적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박수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종다운 종들은 알게 모르게 비정상으로 취급당합니다. 주님! 성전에 들어가셔서 노끈으로 만든 채찍을 휘두르신 적이 기억나시나요? 독사의 자식들이라며 호령하시던 일도 잊지 못하실 것입니다. 유대 군병들에게 체포당하실 적에 하늘에서 급강하를 위해 대기 중이던 12군단 천군들의 위용을 저는 간혹 상상합니다. 사랑하던 제자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 대갈일성 하시던 장면도 제 영어 이름이 베드로(Peter)이다 보니 예사롭지 않게 새깁니다. 가룟 유다가 꾸미는 일을 아시고 돌이킬 기회를 몇 번 주셨던 일도 생각납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꾸짖고 야단치긴 했어도 모질게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 생전에도 그랬는데 지금은 주님께서 부재중이시니 점잖지 못한 표현으로 정말 ‘개판 5분 전!’입니다. 주님도 어지간하십니다. 참고 견디는 것도 어느 정도지 그저 참고 기다리기만 하시니 그렇게 하는 게 아닐까 여겨집니다. 지금의 상태는 해도 해도 너무 합니다. 중세의 암흑시대는 요즘 상황에 비한다면 조족지혈(鳥足之血)입니다. 코끼리 발에 비스킷입니다. 부족한 종이 느끼기에도 이 정도인데 주님 속은 얼마나 타들어 가시겠습니까? 제 좁은 소견엔 주님 오시기 전에 한번 솎아내는 것도 좋을 듯싶은데요? 그렇게 솎아내다 보면 지상에 아예 종이라 일컬어지는 이들의 씨가 말라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실 겁도 납니다. 아니면 아예 오실 때까지 마냥 기다리실 것인가요? 더 악화될 자들도 많겠지만 개중에는 혹 돌아올 자도 있을지 모르지요. 하도 인간들이 설쳐대는 모습이 꼴불견이어서 답답한 김에 푸념을 늘여놓았습니다.“

 

모세와 독대하신 그 독대하심을 갈망 합니다

“주님! 어려운 부탁이지만 감히 독대를 요청합니다. 모세처럼 하나님의 등을 보지 않아도 좋습니다. 희미한 그림자라도 좋습니다. 환상이라도 상관없고 꿈속이라 해도 반길 것입니다. 주님! 기억하시지요? 수년 전에 제가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주님은 저를 독대해주셨습니다. 하루 전날 온 종일 징조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가 그 밤의 기이한 은혜로 인해 깨달았습니다. 이제 저는 탄원 드립니다. 저를 만나주십시오! 긴히 상의드릴 일이 있습니다. 기도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고 말씀을 붙들고 몸부림칠 수도 있지만 은밀히 만나 뵙고 싶습니다. 어찌 하면 이 파탄 직전의 난국을 수습할 수 있을는지요? 어떤 충격파라도 가해 종들의 혼미함을 일깨울 수만 있다면 그 일이 무엇이든 행할 것입니다. 망치가 되라면 기꺼이 그럴 것입니다. 망치 맛을 보겠느냐? 하시면 “뜻대로 하십시오!”라 답할 것입니다. 저부터 두들겨 맞아도 상관없습니다. 본보기로 사용해도 괜찮습니다. 원래 희생양은 주님께서 보여주신 고육지책이지 않습니까?

응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바쁘신 주님을 번거롭게 해 드리기는 원치 않습니다. 독대를 청하는 제 마음의 소리를 이미 아시기 때문에 독대 여부는 사실 큰 의미가 없습니다. 제 마음의 어떠함을 주님이 아시기에 숨길 것도 없고 드러나지 않을 것도 없습니다. 이런 갈망이 저를 위한 소원은 아니지만 결국 저와 연관된 일입니다. 그렇지만 분명 모두를 위한 길임도 아시지요! 주님께는 반드시 해결책이 있을 것이기에 이렇게라도 주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다만 알려주십시오! 행하라 말씀만 하십시오! 낌새만이라도 넌지시 알려주십시오! 용사로 부름 받았기에 그동안 익힌 내공과 비술을 마음껏 펼쳐 주님을 섬기렵니다. 형제와 친구의 가슴에 창끝을 겨누었던 비느하스처럼 검을 휘두를 것이며, 얼굴은 놋 성벽이 되고 몸뚱이는 쇠기둥이 되어 적대자들의 파상공격을 막을 것입니다.

 

영원의 벽에 기대어 영원한 진리를 대할 날을 사모하며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주님께 이 작은 생명의 모든 날이라 해야 티끌의 미세한 분자에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게는 이 짧은 시간들이 영원의 문턱처럼 멀고 길게만 느껴집니다. 제게 주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인지 하루 살기도 벅차하면서 영원을 계획합니다. 그 날을 전심으로 사모합니다. 그 날이 이르러 주님 안에서 저의 작은 형체가 녹아질 때 저의 감당치 못하는 재능 까닭에 자주 끊기던 임재의 맥도 불통의 우려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의 영원한 임재도 지금의 느낌과는 완연히 다를 것입니다. 말씀이신 주님께서 진리의 알맹이들을 하나하나 보여주실 때 깊은 깨달음에서 완전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미처 파지 못한 진리의 우물에 시추공을 박아 넣으면 사막에 샘물 터지듯 할 것입니다.

그 나라에 가서도 성령님을 사부로 모시고 진리를 배우고 싶습니다. 학습 동아리들을 구성하여 공부다운 공부에 임해볼 것입니다. 난해한 말씀들이 하나의 구슬에 꿰여 진리의 빛을 발할 때 성령의 기운이 그 모임을 뒤덮어버릴 것입니다. 질문이 생김과 동시에 해답이 주어지는 교감의 배움을 즐길 것입니다. 주님과의 탁상 담화가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시간이 사라진 그곳에서 영원의 벽에 기대어 시작도 끝도 없는 진리를 마주 대하고 싶습니다. 그 날을 한없이 사모하고 동경하는 자로서 이 작은 자는 오늘도 험난한 나그네 길을 배우고 익히는 걸음으로 의미 있는 흔적을 남겨가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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