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34) 죽음(dead)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란 말이 있다. 이것은 ‘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의 번역이다.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 이 말 한마디를 벽에 붙여놓고 살아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스스로 돕는 자’가 도대체 무슨 말인가? 자기 자신을 돕는다는 말인가. 스스로 남을 돕는 자란 뜻인가? 그렇다면 남을 도와주어야 자기도 하늘의 도움을 받는다는 뜻일 것 같지만, 아니다. 제대로 된 번역은 “하늘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를 돕는다.”이다. help oneself는 ‘스스로 돕는다’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영어 격언과 다르게 말씀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가 아니라 죄와 허물로 죽은 자를 살린다고 말씀한다. 죽을 자도 아니고 죽어 가는 자도 아니다. 죽은 자는 스스로 도울 수 없고,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알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삶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현대인은 ‘죽음’(death)보다 ‘죽어감·죽어가기’(dying), 즉 잘 죽는 방법인 well-dying이 관심사다. 바울에게 삶의 반대말은 ‘죽음’이라기보다는 ‘죽었음’(dead)이다. ‘죽을 수밖에’ 또는 ‘죽을 뻔’이 아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너희는 인간의 최후 상태가 아니다. 여기서 죽음은 죽은 상태를 말한다. 죽음은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점에서 보아야 한다. 죽음은 예수님에 의해 정복되었다. 죽지 않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죽음의 정복이 그리스도의 사건의 핵심적인 요소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한 것이 십자가의 복음이다. 죄와 허물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단절되게 하고 소외시킨 영적 죽음을 초래했다. 그들의 영적 죽음(spiritual death)은 허물과 죄의 결과였다.

 

1. 죽음은 죽은 상태를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죽음’이란 말은 금기(taboo)에 해당한다. 미국 인디언인 나바호 족은 “죽음에 대해 얘기만 꺼내도 죽음을 초래한다”고 믿는다.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하나님과 관련해서 경험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분리는 죽음에 상응한다(참조, 4:18). 구약성경에도 우회적으로 표현(a circumlocution)한다.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왕하 22:20), ‘음부 또는 스올로 내려가는 것’이다. 이곳은 아무런 일이나 교제가 없는 침울한 곳이다(전 9:10; 시 6:5). ‘죽음’하고 발화되는 순간, 불행과 음울이 우리 주변을 감싸온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 어느 누구도 선뜻 죽음 쪽으로 말머리를 돌리려 하지 않는다. 죽음이 과연 금기 영역에만 머물러야 하는가. 알고 보면 죽음은 일상이다.

임마누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1906~1995)는 ‘신, 죽음 그리고 시간’의 도입부에서 묻는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무엇을 아는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는 답한다. “경험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어떤 행동이 멈추는 것이다. 표현적 운동들이 멈추고 또 그 표현적 운동들에 둘러싸여 숨겨졌던 생리적 운동들이나 생리적 과정들이 멈추는 것이다.” 여기서 죽음은 미래에 일어날 이다. 파키스탄 출신으로 듀크대 병원 심장전문의 와라이치, 하이더(Haider Warraich)는 ‘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Modern Death: How Medicine Changed the End of Life)이라는 책에서 인상적인 말을 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헌혈 같은 이타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가능성이 더 크다.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지닐 가능성이 더 크다. 마지막으로, 짐작과는 정반대로, 죽음을 상기하면 오히려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스트레스가 적을수록 더 건강하게 오래 산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시간에 앞서서 오는 세대의 생명을 가지고 왔다면, 그러한 부활의 삶에 참여하기 이전의 각 사람의 상태는 대조적으로 말해서 죽음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죽음은 현재와 같이 구성된 우리의 몸에는 필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WeCroak’라는 이름의 앱이 있다. 앱을 열면 간단한 소개 글을 만난다. “부탄 속담에 하루 다섯 번 죽음을 사색하면 행복해진다.” 이 소개 글 그대로다. 이 앱은 “잊지 말라. 당신은 죽을 것이다”라는 알림과 함께 하루 다섯 번 죽음에 대한 글을 보내준다. 영화 ‘조커’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코미디 노트에 적어 놓은 “나의 죽음이 삶보다 가치 있기를”이란 문장에선 죽음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죽음은 아무도 예외가 있을 수 없는 절대적 평등의 세계일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이 동경의 대상이 될 순 없을 것이다. 노화와 최후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히 9:27). 그러나 성경은 죄의 결과로서 죽음에 대해 말한다. 죄의 결과로서 죽음은 신체적인 죽음 이상의 것이다. 최후의 육체적인 죽음이나 죄인이 겪을 종국적인 영원한 죽음의 상태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매우 실제적인 영적 죽음을 지칭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에 관한 관점으로부터 살펴볼 때, 바울은 이전의 삶을 죽음, 즉 영적인 죽음, 하나님이 없는 삶, 또는 살 가치가 없는 무의미한 삶으로 간주했다.

에베소서 2:1에 허물과 죄로 ‘죽은’에 해당하는 ‘νεκρός’(네크로스)는 ‘죽은 사람’이나 ‘죽은 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분사인 ‘tme’(메트)를 번역하기 위해 주로 사용된다.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에 대하여 문자적인 의미에서 일률적으로 사용된다(예, 아브라함의 아내 창 23:3; 왕하 19:35). ‘죽은 사람 또는 시신’(dead person or body)를 가리키는 보통명사와 ‘죽은’(dead)라는 형용사로 사용된다. ‘고생’ 또는 ‘불운’이라는 기본 의미를 지닌 어근 ‘네크’에서부터 죽은 사람이나 시체의 의미를 지닌 네크로스가 파생했다. LXX에서는 죽은 사람 또는 시체(a deceased person or a corpse)에 대하여 주로 사용된다. 형용사로서 네크로스는 신약에서 죽은 자들(행 5:10; 계 1:18)과 생명 없는 육체(약 2:26)를 가리킬 때 나온다. 명사로서 네크로스는 산 자(the living)와 반대되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네크로스가 명사와 형용사로서 130회 나온다. 이 단어는 사도행전, 로마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다른 곳보다 더 많이 나온다.

 

2. 허물과 죄는 죽음을 가져왔다

공자는 ‘삶도 제대로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랴’(未知生 焉知死)고 했지만, 현대인에겐 라틴어 경구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가 더 절실하다. 바울이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할 때 미래가 아니다. 죽음은 사건(event)일 뿐만 아니라 상태(status)다. 로마서 8:6에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육신의 생각이 죽음을 야기시킨다고 하지 않는다. 육신의 생각이 사망이라고 선언한다.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덧붙이고 있다. 죽음은 비관계적이고, 무기력하고, 부패하다. 죄의 결과로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지 못했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왜곡시켰다. 그들은 변화할 수 없는 무기력을 가졌고, 파괴로 내몰렸다. 하나님은 죽은 사람과는 더 이상 관계하지 않는다(시 88:10). 죽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한다(시 115:7). 그들에게는 희망이 없으며(시 143:3) 그래서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전 9:4). 신자들이 일으키심을 받은 그 죽음은 그들의 죄악된 행동으로 특징지어지는 존재의 죽음이라면 그리스도께서 일으키심을 받은 그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이다(엡 1:20). 죽음이란 인간이 하나님의 뜻과 법을 어김으로 말미암아 형벌로써 인간에게 주어졌다(창 2:17). 이것은 죄가 만민을 보편적으로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사람은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롬 5:12-14).

<The Resurrection>, Sebastiano Ricci(1659-1734)

죄와 허물이 죽음을 가져왔다. 두 가지가 같이 나오는 이유는 인간의 영적 죽음에 대해 입증할 방법이 많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죄는 죽음의 독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속죄의 죽음으로써 이 사망의 독침을 제거하셨다. 죄와 허물로 죽은 것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다. 두 번째 죽게 되는 죄인의 궁극적인 운명, 즉 영원한 죽음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는 단순히 비유적인 표현도 아니다. 칼빈의 말을 빌리면 ‘실제적이고 현존하는 죽음’이다. 우리는 죽었고 죽어야만 하는 것은 아담의 죄의 결과였다. 그 형벌은 육체적인 동시에 영적인 면을 포함한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바울의 가르침 속에는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연합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리하여 신자들은 자신이 죄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로 간주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죄를 섬길 의무가 없다(롬 6:1-4; 골 3:1-3).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신적 생명을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육체적인 죽음을 맛보아야 한다. 이는 육체적인 죽음이란 극복해야 할 마지막 원수이기 때문이다(고전 15:26). 로마서 5:12-21에서처럼 죽음은 죄의 결과다. ‘허물과 죄로 죽은 너희를’이라는 표현은 죄가 사망의 원인이고 죽음의 증거라는 것을 암시한다. 죄와 허물이 죽음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죄인들과 그들의 죄가 죽음이라는 동일한 영역에 함께 처해 있다.

헬라어 본문은 ‘너희를’에 해당하는 ‘ὑμας(휘마스)’가 목적격의 위치에 있으나 목적어를 만들 만한 명백한 동사가 없다. 정동사(finite verb)가 없이 분사절(participial clause)인 ‘너희 죽은 자들’로 되어 있다. 헬라어 구문 속에는 파격 구문(anacoluthon)이다. 동사는 6절의 ‘함께 일으키사’에 해당하는 ‘συνεγείρω(쉬네게이로)’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죽음의 공포에 압도당하지 않는다. 심판이 없다. 이는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 이상 죄와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죄와 허물로 죽은 것은 하나님의 형벌이다. 로마서 6:23이 죄의 삯, 즉 죄의 대한 마땅한 벌로서 간주하다. 이 진리로 우리는 죽음을 생각할 때 양가감정을 느낄 수 있다. 죽음의 엄청난 공포와 역설적으로 그 진리는 소망의 기쁨을 준다. 하나님은 전 과정을 지배하고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죽음이 죄의 대가라고 선언하실 뿐만 아니라 죄지은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결심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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