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만 되면, 수많은 설교가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아기 예수가 구유에 누워있는 모습과 더불어 주위에는 양과 소와 비둘기 같은 동물들이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를 보고있는 그림 또한 자주 등장한다. 

크리스마스의 홍수와 같은 말씀들 중에 과연 진짜는 얼마나 있을까? 카드와 동영상도 예수 그리스도는 없고 온통 산타 크로스와 같은 가짜가 판을 치는 계절에, 진짜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은 얼마나 선포되고 있을까?
많은 설교자들이 구유에 누워있는 예수님을 낮고 천한 곳에 임하신 것으로 표현한다. 정말 그럴까?

성경의 대부분이 상징 즉 은유로 쓰여있다는 것을 안다면 왜 예수께서 구유에 누워계셔야 했는지, 그리고 예술가들이 그 주변에 양과 소와 비둘기 등 레위기 11장에서 먹을 수 있다고 주께서 말씀하신 정결한 짐승들을 그려놓았는지 진리의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생각하도록 이끄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스스로 소개하시며(요 6:48),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1, 53)라고 하셨다. 즉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어야만 그분과 관계가 있다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의 양식으로 이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동물들의 먹거리를 담는 여물통 위에 누워서 보여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주변에 예술가들이 그린 정결한 동물들은 무엇인가? 늘 주변의 동물들을 보면, 레위기 11장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정하다고 하신 돼지나 토끼와 같은 동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왜 그럴까?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짐승을 같은 여섯 째 날에 창조하셨다. 그래서 계시록 13장 18절에서는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666이니라"라고 말씀한다.

지혜 즉 성령받지 못한 이들은 666을 베리칩 또는 수많은 것을 갖다 붙이며 그것을 받지 말라고 거짓말을 지어내느라 쓸데없는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한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듯 666은 짐승의 수이면서 동시에 사람의 수이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짐승과 사람이 같다는 말이다.

짐승과 사람은 같은 6일에 창조되었다. 그래서 짐승과 사람의 수가 6인 것이다. 그 수에 하나님의 수인 1이 더해질 때 안식의 수이며 완전수인 7이 된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하늘의 수를 777이라고 한다.

6(인간, 짐승)+1(하나님)=7. 하나님과 연합되지 못해 6으로 살고 있으면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인간은 아직 짐승일 뿐이다. 성령받지 못한 인간, 하나님과 한 몸이 되지 못한 인간, 생명의 양식(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보다 다른 말을 더 좋아하고 따라가며 다른 걸 먹고싶어하는 인간, 예수님이 머리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나 세상 가치관이나 이념 등 다른 것이 머리가 되어 있는 인간, 하나님의 나라보다 자기 나라를 먼저 구하는 인간들을 가리켜 성경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말씀한다. 

성경에서 사람은 "인자"라고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다. 그래서 인자이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을 때에 비로소 그를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은 자는 짐승이다. 그래서 다니엘 7장을 보면, 세상의 강대국을 설명할 때에 사자, 곰, 표범 등 동물로 표현하며, 이방인들은 "개"라고 말하고, "돼지"는 행위를 강조하는 종교인들을 말한다.

그러므로 구유 옆에있는 짐승들이 왜 모두 정결한 짐승들인지 답이 나온다. 생명의 양식을 먹어 생명수 강가에 나아가 생명의 법 안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자들은 안팎이 모두 구별되어야 하므로 정결한 짐승들만 예수님이 누워계신 구유 주변에 있는 것이다.

돼지는 겉은 굽이 갈라져서 외모상으로는 합격이지만, 새김질을 하지 않으므로 부정하다고 말씀한다. 새김질은 묵상을 말하며 묵상은 마음에 간직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심비에 새긴다"라고 한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후 3:3)

열심히 기도하며 모든 집회에 참석하면서 종교생활을 하는 이들이 많다. 종교인들은 마음에 생명의 법을 새기지 않고 그 시간에 행동을 하라고 행위를 강조한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행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간직하라고 하신다. 그런데 성령이 없는 이들은 간직하는 것보다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좋아한다. 주께서 하시는 것보다 자기가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 주님을 드러내기 보다 자신이 무언가를 해서 드러내기를 좋아하며, 자기들처럼 행하지 않는 자들을 비난한다.

이처럼 겉으로 열심히 종교생활을 하는 자들을 성경에서는 "돼지"라고 표현한다. 돼지는 씻어도 또다시 진흙탕으로 돌아가는 습성이 있고, 모든 쓰레기를 먹는 잡식성 동물이라서 더러운 짐승이므로 만지지도 말라고 하신다. 

그래서 열심히 집회를 인도하며 귀신을 내쫓고 병든 자를 고치고 선교와 기도와 수없는 예배를 하며 재산을 정리해서 힘써 가난한 자들을 돕고 자신도 가난하게 살지만, 주께서는 그런 이들을 향하여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말씀하신다.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2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예수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시며 "그릇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내면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찼다"고 하시며 그러한 그들을 향하여 "소경"이라고 하신다. 

그들은 자신들이 본다고 하면서 겉을 깨끗하게 닦을지라도 땅의 세계만 볼 뿐, 내면과 하늘의 세계를 보는 영적인 눈이 감겨져 보지 못하므로 주님께서는 소경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말씀을 간직하지 않고 열심히 먹기만 하는 소경들 즉 행위만 열심히 하는 종교인들을 "돼지"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의 양식인 예수님이 누워계신 구유 주변에 돼지는 없고, 양과 소와 같은 정결한 짐승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유에 누워있는 것을 낮고 천한 곳이라며 불쌍하게 생각하도록 미혹하는 설교는 더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 종의 형체인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것이 낮추신 것이지, 구유에 누워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빌립보서 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또한 예수께서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하신 말씀을 문자대로만 해석하므로, 예수님처럼 집도 없이 모든 것을 다 팔아서 나누어주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을 진짜 크리스천이라고 가르치면서 거짓 증인의 삶을 사는 것도 이제는 그만 해야 한다.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은 누워서 잘 집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을 머리로 두는 교회가 없다는 말씀이다. 

지금도 이 말씀을 문자대로만 해석하여 "집이 있는 자들"은 믿음이 없는 자이며, "집이 없는 자들"은 믿음이 있는 것처럼 말하며, 또 작은 집을 사서 작은 집에서 사는 자는 괜찮고, 큰 집을 사서 큰 집에서 사는 자는 믿음이 없는 것처럼 말하는 어리석은 이들이 많다. 성경에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라"는 말씀의 "소유"는 "율법과 말씀"을 의미한다.

이처럼 종교인들은 돼지처럼 겉은 굽이 갈라져서 크리스천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나 영의 세계를 보는 눈이 가려진 채로 성경을 읽으니 그러한 소경들은 땅의 것으로만 먹이고 가르쳐서 그를 따르는 이들을 죽음의 길로 구덩이로 함께 빠져 죽게 만드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을 머리로 두지 않고, 자기들의 지식과 상식과 경험을 머리 삼아 해석하고 가르치므로 수많은 양떼들이 그러한 소경을 따라 함께 구덩이에 빠지게 하는 오늘날의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스스로 하나님과 친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이사야서를 통하여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이사야 42:18-20
18.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 보라.
19.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나의 보내는 나의 사자같이 귀머거리겠느냐? 누가 나와 친한 자같이 소경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같이 소경이겠느냐?
20. 네가 많은 것을 볼찌라도 유의치 아니하며 귀는 밝을찌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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