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40) 다윗(David)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신구약성경에서 천 번 이상 언급되는 인물은 누구일까. 다윗이다. 성경 속에서 가장 복잡하고 다면적 성격을 드러내는 캐릭터다. 모든 기질을 위한 성경적 인물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영속적인 통치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였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삼상 13:14). 하나님께서는 시편 89:19-29에서 그에게 보증하셨다.

다윗은 물매돌로 거인 골리앗의 이마를 쳐서 쓰러뜨린 후 그의 목을 벤다. 물매돌로 이마를 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의학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린 무기인 ‘물매’는 시대 변화를 반영한다. 당시 철제 무기는 귀했던 반면 물매는 흔한 ‘무기’였다. 심지어 수백명 규모 ‘물매 부대’를 운용하기도 했다. 로마의 역사가 리비의 기록에 따르면 에게해 주민들은 최고의 물매돌 전문가들로, 이들은 단지 적군의 얼굴을 명중시킬 뿐만 아니라 얼굴의 특정 부위를 정밀 타격하는 데도 능했다고 한다.

1967년 ‘6일 전쟁’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한 전 이스라엘 국방부 장관 모세 다얀도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골리앗과 싸운 다윗은 열세가 아니라 우세한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위대함은 자신보다 강한 적을 상대로 싸우겠다고 나간 것에 있지 않고 나약한 사람이 장점을 파악해 더욱 강해질 수 있는 무기 활용법을 잘 아는 데 있었다.’ ‘다윗과 골리앗’의 저자 Malcolm Gladwell에 따르면 다윗의 승리는 기적과 운이 따른 것이 아닌 지혜와 전술의 결과였다. 경영사상가인 그는 골리앗과 맞선 다윗은 이길 가망이 없는 근접 전투를 거부하고, 작은 키와 민첩함을 무기로 골리앗의 빈틈을 공략했다. 혁신의 원천이 다윗의 작은 키(약점)였다. 그런데도 ‘불가능해 보이는 승리’의 비유로 잘못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다윗은 청동 투구를 쓰고 전신 갑옷을 두른 210cm 거인이었던 골리앗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양치기였던 다윗은 맹수와 싸우면서 터득한 방식으로 속도와 기동성을 살려서 느리고 시력이 약한 골리앗을 향해 정확하게 돌을 던진 후에 쓰러진 그의 목을 벴다.

 

1. hero vs underdog

성경과 그에 수반되는 전승 속에서 다윗에게 수많은 이미지가 주어진다. 다윗이 사무엘에게 비밀히 기름부음을 받을 때 invisible(눈에 띄지 않는)했다.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의 목을 베었을 때 갑옷을 입지 못할 정도로 보잘 것 없는 목동이었다. 다윗은 치기 어린 혈기나 광신적인 믿음으로 골리앗을 상대한 것이 아니다. 철저한 준비와 경험이 그를 골리앗과의 싸움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다윗은 엄청난 믿음의 소유자였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노력가이자 전략가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가 이스라엘을 위해 벌인 전쟁에서 연전연승한 이유가 그것을 증명한다.

다윗은 악령에 사로잡힌 사울을 수금으로 달래 주었던 궁중음악치료사였다. 사울의 살인적인 질투로 늘 쫓겨 다녀야 했던 도망자였다. 성전을 짓고자 했지만 준비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이런 다윗에게 메시야에 대한 약속을 하였다(삼하 7장). 다윗의 체험 속에는 새언약의 자녀들에게 낯설고 비위에 거슬리는 요소들이 들어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는 사람이었다. 그 시대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위한 밝게 빛나는 빛으로 뛰어났다. 인간은 도덕적 신념을 가지고 있고 이에 합당한 행동을 하려 한다. 그러나 비도덕적 행위를 하게 될 경우 스스로 이 행위에 맞는 이유를 찾아 합리화하면서 심리적 조화를 가지려 한다. 바로 도덕적 부조화(moral dissonance) 개념이다.

다윗은 민족적인 영웅으로서 이미지보다 앞서는 것이 underdog(요즘 표현으로 아웃사이더), 즉 약자로서의 그의 경력이다. 다윗은 미래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을 자리에 가장 적당하지 않는 자로 여겨졌다(삼상 16:1-11). 사울의 위협을 피해 도망자가 되어 벼랑 끝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심지어는 다윗에게 반항자나 무법자로서의 기질도 약간 나타난다. 예수님이 다윗이 자신들의 사람을 먹이기 위해 레위의 법을 불순종한 전례로 인용하신다(마 12:3; 눅 6:3-4). 당시의 사람들도 이와 같이 그를 위대한 사람으로 알았다. 그는 지극히 고상한 행위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대단히 비열한 행위를 하기도 했다. 바울은 바울에게서 이상적인 히어로를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을 통해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다윗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다윗을 통해 장차 올 메시야에서 찾았다. 그 메시야는 그의 백성을 구원할 것이다. 영원히 다윗의 위에 앉을 것이다. 이것이 이상주의자의 헛된 생각이 아니다. 우상숭배는 더더욱 아니다. 과연 육체를 따라 다윗의 후손으로부터 메시야가 왔다.

 

2.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 다윗은 성경에서 통치자, 전사, 시인, 음악가, 선지자이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평가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다윗은 장차 오실 이상적인 왕, 곧 메시야의 모형이라는 것이다. 다윗에 대한 칭찬은 다윗의 후손인 그리스도와 예표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 다윗의 혈통에서 그리스도의 신뢰성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

동양 사회에서 지도자로 꼽았던 풍채는 '압인지상(壓人之相)'이었다. 상대방을 압도하는 관상과 체격이 압인지상이다. 대중 앞에 섰을 때 키도 크고, 목소리도 굵으며, 눈매도 부리부리해서 처음 보는 순간에 상대방을 압도하는 인물이 동양의 지도자상이었다. 동양의 전통에서는 지도자를 논할 때 흔히 신언서판(身言書判)을 이야기한다. 풍채와 얼굴 모습, 말하는 태도와 조리가 있게 말하기, 필체와 문장력, 그리고 판단력이다. 그중에서도 신(身)이 맨 앞에 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신(身) 중에도 첫인상을 좌우하는 것은 얼굴이다. 생김새를 포함해 얼굴에 나타난 기운이나 호감도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외모·목소리·내용 등을 들고 있는데, 동서양이 너무나 비슷하다. 서양의 경우, 내용은 인물 평가 비중에서 7%의 영향력 밖에 없다는 통계에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사무엘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에게 기름 붓기 위해 이새의 집으로 향했을 때 다윗은 왕이 될 후보인 여덟 명의 형제들 중 가장 어리고 볼품없는 존재였다. 후보자 명단에도 없는 존재였다. 외모를 보고 간택을 하고자 했던 사무엘은 그러나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야훼는 중심을 보느니라.’는 말씀을 듣는다(삼상 16:7). 사무엘이 어떤 겉치레 없이 베들레헴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삼상 16:1-13).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은 다윗의 신언서판이 아니라 신실한 중심으로 인해 확증된다.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은 사무엘상 13:14에서 하나님이 사울에게 전한 말씀을 살짝 인용한 것이다. 여기에서 사울이 길갈에서 불순종한 후에 하나님은 ‘마음에 합한 사람’을 구할 것을 선언한다(시편 89:20).

다윗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사건은 무엇일까. 골리앗을 이긴 사건일까. 헤브론에서 7년 반 동안 통치하고, 예루살렘에서 33년 동안 통일 왕국을 통치한 것일까. 성전 건축을 기획하고 준비한 것인가. 다윗의 일생에 가장 위대한 사건은 하나님의 선지자 나단으로부터 메시야에 대한 약속을 받는 것이다(삼하 7장). 이것은 시편 2편, 89편, 110편(시 72편 참고)에 반영되어 있다. 다윗의 집에 대한 하나님의 이러한 언약은 그리스도에게서 영광스럽게 성취된다. 이사야는 이것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라고 말했다(사 55:3). 다윗 언약을 전하는 나단의 예언은 이스라엘에 발생한 메시야 사상의 근본적인 토대를 제공한다. 사무엘하 7장의 사건은 시편 89편에 시로 반복된다.

다윗의 삶을 있는 그대로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은 그가 영웅으로서 선 순간이 아니라 그의 실수와 실패의 시간에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집을 짓겠다고 말씀하신다. 그가 영웅이고 대단한 존재가 되어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범죄하고 보잘 것 없는 죄인을 위하여 집을 건축하겠다는 것이다. 다윗이 의롭고 훌륭한 건축가이기에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실패자 다윗을 통해 구원을 이루실 것을 약속하신다. 다윗의 대가 끊어지지 않고 영원히 이어질 것과 야훼의 영원한 은총과 야훼와 다윗의 후손 사이에 주어질 유일한 부자관계, 그리고 다윗의 영원한 보좌가 약속된다.

Nathan and David, Painted by B.west F.R.A. Engraved by S. Sangster

다윗이 위대하고 성군인 것은 영웅으로 살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밧세바의 아내를 성폭행하고 살인이라는 범죄까지 저지르게 됨으로써, 한 가지 범죄는 또 다른 범죄를 부르게 된다는 점에 전형적인 인물이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면 얼굴이 두껍든가, 뱃속이 시커멓든가 둘 중 하나가 돼라.’ 이렇게 말한 사람은 중국 신해혁명 당시 동맹회의 일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던 풍자가 이종오(李宗吾)였다. 그는 나중에 ‘후흑학(厚黑學)’을 창시하고 스스로 교주가 됐다. 다윗은 한 때 낯가죽이 성벽처럼 두껍고 속마음이 숯덩이처럼 시커먼 적이 있었다. 그러나 눈물로 베개를 적시기까지 회개하고 돌이켰기 때문에 용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약속은 폐기되지 않고 유효하게 된다.

실패자 다윗이 이렇게 위대한 것은 물론 회개하고 용서를 받은 것도 있지만 그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뜻을 그가 온전히 순종하였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영원한 가문에 대한 약속(삼하 7장)은 다윗의 시편들과 선지서들에서 이상적인 왕 다윗의 가문에서 나오리라는 기대로 나타난다. 신약의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소망이 성취되었다고 본다. 옛날엔 ‘생긴 대로 산다’는 수동적 운명론이 지배적이었다. 요즘엔 ‘사는 대로 생긴다’는 능동적 관상학이 우세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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