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41) 용서(容恕)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이 용서의 출발

많은 사람들이 용서를 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선뜻 용서할 마음을 내지는 못한다. 자신에게 피해를 입히고 마음에 상처를 준 그 사람과 사건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서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보다 나은 삶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관문이다. 성경에서 용서의 주제는 하나님의 뜻을 범한 인간들이 자비를 부르짖어 구하고 얻을 때만 등장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용서는 사람이 죄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요일 1:9). 죄를 지은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될 때 용서가 완성된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이 하나님과 그의 관계를 파괴한 것과 마찬가지로 용서는 이 관계를 회복시키는 방법으로서 복음 선포 안에 중심 위치를 차지한다.

덴마크 철학자 스벤 브링크만 (Svend Brinkmann)의 ‘철학이 필요한 순간’이란 책에서 인생철학이 되어줄 10가지 원칙을 소개한다. 그 중에 한 가지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말한 ‘용서는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일이다.’ 공자는 사람에 대한 진심을 표현하는 방법을 충서(忠恕)라고 했다. 서(恕)는 마음 심(心)과 같을 여(如)가 합해진 글자다. 진심 어린 용서란 잘못을 저지른 사람과 피해를 본 사람의 마음(心)이 같아질 때(如) 저절로 생기는 행동이라는 의미다. 공자는 가르치기만 했지만 예수님은 친히 사람과 같이 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고, 우리의 허물과 죄를 사하시기 위해 대신 죽으셨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에는 동·서양 공통의 지혜가 담겼다. 채근담에도 나온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도 언급되는 말이다. 간디도 이 말을 인용했고 아우구스티누스 “죄인은 사랑하고 죄는 미워하라”라고 역설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는 대신, 그 죄를 용서하시고 덮어 가리신다.

성경을 제외한 어떠한 종교적인 서적도 하나님께서 죄를 완전히 용서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헬라의 작가들은 인간의 죄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 해결 방법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이성의 위대함에 호소하는 스토아 철학은 비인격적이고 기계론적인 우주론을 방탕으로 삼고 있었다. 유대교 문헌들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확인한 은총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공로에 따라 심판하는 분으로 이해된다(집회서 16:11-14).

 

1.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아버지시다

용서는 은총의 하나님 또는 용서의 하나님이라는 이유에서만 가능하다. 느헤미야는 ‘주께서는 용서하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했다. NRSV는 ‘you are a God ready to forgive’, 즉 ‘언제든지 용서할 준비가 되신 하나님’으로 번역했다. 다니엘은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용서하심이 있다”라고 고백한다. 구약성경 전체에서 용서를 이해하기 위해 매우 교훈적이 본문은 출애굽기 34:6 이하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의는(1:17; 3:21-22) 그 분이 불의한 자를 정당하게 의롭다 하시는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의롭다는 표현은 이중적인 계산, 어떤 자에게 돌리는 것 혹은 셈을 의미한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와는 전혀 별개로 믿음에 의해 주시는 값없는 선물로서 우리를 의로운 자로 여기신다. 부정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실 것이다. 즉 죄를 사하실 것이다. 의롭다고 여기는 것은 죄를 용서한다는 것이다.

용서하는 것과 잊는 것 중에서 어느 게 더 쉬울까. 영어로 용서하다는 forgive, 잊다는 forget이다. 혹자는 주는(give) 게 얻는(get) 것보다 쉬우니 용서가 먼저라고 한다. 정반대의 논리도 만만찮다. 어찌됐든 용서하기와 잊기는 증오·원망·억울함 등과 맞물려 좀처럼 떨쳐내기 힘든 두 단어다. 데이비드 리프(David Leaf)가 지은 ‘망각 예찬(In Praise of Forgetting)’은 ‘기억하지 말고 잊어버리자’고 주장한다. 저자는 ‘기억은 폭력을 악화시키고, 화해를 방해한다’고 말한다. 모든 역사적 기억은 선별적이다. 물론 기억할 것은 기억해야 한다. 용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희생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주시고(롬 8:32; 고후 5:21)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에게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게 하셨기 때문에(롬 3:21-28) 생겨난 것이다.

성경 기자는 우리에게 말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다”(시 103:12)고 한다. 예레미야 31:34에서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한다. 김형준은 그의 저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연습’에서 용서는 새로운 미래를 맞기 위한 '선택'이라고 일괄한다. 용서는 뒤틀린 과거가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며 과거를 과거로 남게 하여, 어제가 오늘의 기쁨과 감사를 빼앗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경의 용서의 이미지는 어떤 형태로이든 죄를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죄가 옮기울 때, 즉 용서할 때 깊은 바다에 던지우고(미 7:19), 안개같이 걷혀지고(사 44:22), 등 뒤로 던져지고(사 38:17), 옆으로 비켜지고(골 2:14), 치워진다(히 9:26)라고 표현하여 공간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하나님만이 이렇게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다(히 10:17). 이 용서의 주도권은 하나님 편에 있다. 용서는 자명한 이치, 즉 사물의 본질에 속한 어떤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용서를 받는 곳에서 용서는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어떤 것이며 경외와 놀라움으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시 130:4). 죄는 벌을 받아야 한다. 용서는 놀라운 은총이다.

 

2. 하나님께서 죄를 인정하지 않으신다

용서 메커니즘이 없는 문화는 없다. 모든 문화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다시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용서가 가능하려면 전제조건이 있다. 저지른 잘못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죄책감이 있어야 한다. 심리학자들은 ‘건강한 죄책감’이라 한다.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에게서 필수적인 것은 회개다(눅 17:3, 4). 용서를 주시는 하나님에게 있어 필요한 것은 생명이 다할 때까지(레 17:11) 피를 흘리는 것이다(히 9:22). 용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본성에 뿌리가 있다. 그러나 그의 용서는 무차별적이지 않다. 그는 결코 유죄를 없는 것처럼 하지 않는다. 인간의 측면에서 만약 용서받기를 원한다면 회개할 필요가 있다. 회개한 죄인은 용서받는다.

영화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은 뮤지컬 영화다. 주인공 장 발장이 복음의 은혜 안에서 용서받은 죄인을 상징한다면, 자베르는 범죄자를 체포하여 반드시 그 범죄에 해당하는 처벌을 받게 하려고 노력하는 경찰이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의’다. 전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철저하게 죄인으로 인식한다. 후자는 자신을 죄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법과 정의의 편에 서 있는 사람으로만 인식하기 때문이다.

죄를 지었는데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죄가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왜 복이 있는가.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죄를 벌하시는 분이 아닌가. 어떤 판결이기에 그 죄를 인정하지 않는 복을 주시는가. ‘logivzomai’(로기조마이)라는 동사를 NIV는 count, 즉 ‘계산하다, 셈하다’로 번역한다. NASB는 ‘take into account’, 즉 ‘고려하다, 계산에 넣다’로 번역한다. KJV은 ‘impute’, 즉 ‘전가하다, ...에게 돌리다’로 번역한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 죄를 돌리지 않고 제 삼자에게 죄를 귀속시킨다는 뜻이다. 옛날 영국 왕실에서 유행했던 ‘휘핑보이(whipping boy)’, 즉 왕자가 잘못하면 대신 매를 맞는 소년이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장자나 부자 대신 매를 맞는 매품 파는 대행 관행이 있었다. ‘흥부전’에서 흥부가 김 부자 대신 볼기 30대를 맞기로 하고 그 매품의 선금을 받아 오랜만에 밥을 지어먹는 것을 이웃에 사는 꾀쇠아비가 엿보고 그 매품을 가로챈다. 중세 유럽의 귀족 가정에도 있었다. 매를 맞는 하층 계급의 아이다. ‘사랑해서 때린다는 말’이란 책에는 휘핑보이를 바라보는 귀족 아이의 두려움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잘못을 하면 누가 나를 대신해서 맞는 상황이 불러일으키는 공포. 그것 역시 체벌의 다른 모습입니다.” 용서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 사람의 죄를 그에게 묻지 않고 귀속시키는 것이다. 주인이 휘핑보이에게 매를 귀속시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의 죄를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 귀속시키시므로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확증하셨다(5:8). 용서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제거하신다(요 1:29; 벧전 2:21-24). 주의 만찬석상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마 26:28).

죄를 ‘셈한다, 계산에 넣다’는 번역은 재무적이다. 하지만 ‘전가하다 또는 귀속시키다’라고 번역하면 법적이다. 둘 다 ‘어떤 것을 어떤 사람에게 속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전자는 돈이고, 후자는 죄다. 유죄가 될 수 있고 무죄가 될 수 있다. 밖으로 돌아다니는 자금 중 3분의 1 이상이 비밀주의로 유명한 스위스 은행에서 관리되고 있다. 어떤 돈이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호해주는 곳이 바로 스위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산이 이렇다. 죄인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신다. 탕자의 죄를 아버지는 인정하지 않으신다.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아들로 선언하는 것이다. 죽었다고 살아났다고 선포한다. 탕자에게 죄를 묻지도 따지지 않는다. 그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즉 귀속시킨다. 어디에 또는 누구에게 귀속시키는가.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 귀속시킨다. 그래서 그 죄가 인정하지 않는 사람, 바라바와 같은 사람은 복이 있다(막 15:6-15). 종교개혁가들은 주장했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의롭다 하신다는 표현은 그분이 죄인을 의롭게 세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는 의미다. 즉 법적으로 의롭다 여기시고 그렇게 대우하시면서 그들에게 죄를 인정하지 않는, 즉 죄를 귀속시킨다는 의미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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