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징조가 덮고 있는 교회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담임, 본헤럴드대표, 춘천변화산기도원협력원장, 서울신학대학교신학박사, 저서로는 주기도문연구, 제자세우기40일영적순례(1,2권) 등이 있다.

성경의 목적에 맞는 삶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는 길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성도다운 삶인가? 이것은 같은 말이다.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남의 유익을 위해 사는’것이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10:23,24)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다. 성도는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무리들이다. 예수 믿고 구원받고서 이웃을 섬기라고 사명을 받은 영적 순례자이다. 남의 유익을 위해 살아가는 삶을 지향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다. 타인을 섬길 때 내가 더욱 빛나게 된다.

성도는 자기를 불태워 타인의 삶을 빛나게 해주는 존재이다. 촛불의 역할과 흡사하다. 촛불은 자기를 태워 주변을 환하게 만든다. 이것이 성도의 삶이다.

오늘 적지 않은 교회들이 문을 닫거나 성장을 멈추고 있다. 쇠퇴하거나 폐쇄 위기에 있는 교회의 징조가 있다. 미국 남침례교회 소속 전문연구기관인 라이프웨이 연구소의 톰 S. 라이너 박사가 연구를 했다. 그는 폐쇄 위기에 있는 교회를 가르쳐서 이것을 ‘죽음의 징조’라고 불렀다.

(1)첫번째 징조는 4년 이상 교인 수, 특히 예배 참석자 수가 꾸준히 줄어드는 것이다. (2)교회가 지역 사회와 괴리된다. 지역사회의 환경은 변화가 있는데 교회는 그대로 있다. (3)신자들 중 대부분이 나이 많은 어른들이다. 몇 년 뒤 장례를 치루면 남는 성도가 별로 없다. (4)미래가 아닌 과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부분 좋았던 옛 시절 과거만 추억하고 산다. (5)교인들이 자신들의 취향에 몰두한다. 자신들의 음악스타일, 프로그램, 일정에만 신경 쓰지 제자도에는 관심이 없다. 제자도란 자신을 죽이고 주님을 드러나게 하는 삶을 말한다. (6)예산이 심각하게 교회내적인 문제에만 사용한다. (7)몇몇 시설이나 조형물등을 지나치게 신성시한다. (8)무조건 변화를 두려워한다.

이런 죽음의 징조가 보이는 대부분의 미국교회를 연구해보았더니 불행하게도 수천교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사실 미국 교회만 지금 이런 상황이 아니다. 한국교회도 이미 그 현상이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 주일만 반짝하다가 주중에 불꺼진 교회의 모습,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저 속절없이 세월만 낙는 강태공처럼 시간만 흘러보내고 있다. 사람의 움직이 없는 공간은 서늘하다못해 공포감이 밀려올것이다. 이것이 먼 미래의 한국교회의 모습이 아니라 지금 이미 찾아왔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한국 교회는 나갈 것인가? 교회의 존재 목적을 다시 검토해야 한다. 교회 자체를 위한 유익을 구하지 말고 타인의 유익이 무엇인가 고민하고 적극적인 변화를 더욱 추구해야 한다. 삼성 경영자가 ‘마누라 빼고 다 바꾸라’는 말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우리끼리 성장의 열매를 나누고, 우리끼리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을 좋아하면 곧 사망의 음침한 기운으로 덮어질 것이다. 금방 교회는 성령의 감동과 역사를 잃어버리고, 잊혀져가는 쇠퇴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고린도교회를 향한 사도바울의 메시지를 다시 떠올려야한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10:32,33)

왜, 나의 유익보다 타인의 유익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신앙의 성숙을 가늠하는 잣대는 무엇인가? 섬김이다. 다른 사람을 돕는 사람이다. 성숙한 성도는 자신의 유익을 포기할 줄 안다. 그리고 이웃의 유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한다. 이런 성도을 사람들은 좋아한다. 타인에게 유익을 주니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유익을 주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나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존재이다. 그러면 복음과 생명의 역사를 이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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