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43) 옛 사람(old self)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그리스도인은 옛사람이 죽은 사람

퇴계 선생의 ‘도산십이곡’ 중에 있는 시조다. “예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예고 어쩔꼬.” ‘예다’는 ‘가다’의 옛말이다. 옛 사람은 이미 간 사람이다. 십자가에 목 박혀 죽은 사람이다. 무엇이 십자가에 목 박혔나. 우리의 옛 사람이다. 문자 그대로 ‘우리 옛 자아’를 뜻한다(골 3:9). 그러나 에베소서 4:22에서 옛 사람을 벗어 버릴 것을 권면한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옛 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다. 다른 의미에서는 여전히 주의를 요하는 존재다. “이 짐승 같은 놈아!” 분명 사람한테 한 꾸지람이다. 정체는 사람이지만 하는 행동이 형편없는 사람에게 하는 욕지거리다. 누구인지(to be)보다는 무엇을 하는지(to do)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는(in theory) 사람이지만 실질적으로(in practice) 사람답게 행동하지 못하면 부모로부터도 들을 수 있다. 옛 사람은 짐승 같은 사람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영적 짐승이다. 죄 덩어리다. 하나님의 원수다. 죄의 종이다.

옛 사람은 아담 안에 있는 자를 가리킨다. 로마서 5:15-19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아담-그리스도 병행에 나타난다. 회개 이전의 삶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바울에 의해 일관되게 사용되고 있다. 이는 분명히 그리스도 이전의 세대의 삶, 즉 옛 계약 하에 있었던 삶을 나타낸다. 옛 사람은 우리의 죄 된 자아 혹은 옛 본성이 아니다. 회심하기 이전의 우리 전체를 가리킨다. 이전의 자아, 우리 이전의 한때 모습, 우리의 옛 인간성, 우리가 아담 안에서 원래 지니고 있던 모습을 나타낸다. 아담 안에 있었던 과거의 모습이 옛 사람이다. 그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바 되어 죽었다. 그는 죄인으로 세상에 태어났고, 그 결과 그의 몸은 죄의 지배를 받았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아담 안에 있는 지위, 다시 말하면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 있는 옛 피조물의 안에 있는 우리의 지위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옛 것은 이미 사라졌다. 왜냐하면 그는 새로운 창조 질서에 속하여 있기 때문이다(고후 5:17).

옛 사람은 그리스도 이전의 세대의 삶, 즉 옛 계약 하에 있었던 삶을 나타낸다(롬 7:6: 고후 3:14). 옛 시대의 인간에 대한 구원사적 명칭이다. 옛 사람은 신자들이 속해 있는 공동의 구조를 가리킨다. 구속사적이고 공동적인 차원은 개인의 실존에도 영향을 미친다. 옛 사람은 구속사적 실재이지만, 구속사는 인간으로서의 우리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에게 옛 것은 이미 사라졌다. 왜냐하면 그는 새로운 창조 질서에 속하여 있기 때문이다(고후 5:17).

 

1. 옛 사람과 결별하고 새 사람답게 살다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수록된 앨범에 ‘어땠을까’라는 노래가 있다. 가수 박정현과 듀엣으로 부른 곡이다. 여자가 ‘어땠을까’를 반복하는 동안 남자는 ‘내가 그때 널/ 잡았더라면/ 너와 나 지금보다/ 행복했을까’라고 자문한다. 개인적으로 다른 길 또는 방법을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싶을 때가 있다. 흘러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지나간 선택은 번복할 수 없은 것처럼 새 사람은 옛 사람으로 되돌릴 수 없다. ‘어땠을까’하고 노래하지 않는다.

아담과 그리스도는 두 세계, 두 시대, 두 피조물, 즉 옛 사람과 새 사람을 여는 입구에 서 있는 두 위대한 인물로 서로 대립하고 있다. 즉 두 캐릭터의 행동과 운명 안에서 그들에게 속한 모든 자들의 운명이 좌우 된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들에게 포함되어 있으며, 따라서 이들의 죽고 사는 문제는 그들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은 한 사람의 부분이나 본성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그 사람이 속하는 집단과의 관계에 따라 그 사람을 전체적으로 가리키는 표현들이다. 옛 사람은 죄와 사망에 의해 지배되는 아담 세대에 속하는 사람이다. 새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즉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자들이다.

바울은 시조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연결시키는 굴레(band)가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 사이의 연합과 방식과 모형이 됨을 지적하고 있다. ‘아담 안에서’라는 언급은 실제적으로 아담의 범죄가 모든 사람의 죄로 간주되고 있다. 아담은 ‘종말론적’으로 구축되어진 ‘우주적인 인격체’로, 즉 그들에게 속한 모든 세대의 구성원들을 포함하는 그런 인격체이다. 이를 네이비실 훈련을 통해 설명해 보자. 최종 40여 명을 7명씩 한 팀으로 묶어 팀마다 고무보트 한 척씩을 배정한다. 100kg가 넘는 보트를 머리에 이고 백사장을 몇 km씩 달리고, 바다 위에서는 노를 젓는다. 각 조의 순위를 매겼다. 2조는 거의 모든 경주에서 승리했다. 팀워크가 완벽했다. 반면 6조는 거의 매번 꼴찌였고, 팀원들은 서로 비난하고 분노했다. 2조와 6조의 리더만 바꾸어 보았다. 꼴등이었던 6조가 새 경주에서 1등을 한 것이다. 6조에서 바뀐 것은 리더 1명이었다. 그는 구성원들을 비난하지 않았고, 운이 나빴다고도 하지 않았다. 옛 사람이 속한 리더는 죄다. 조 이름은 아담조다. 마냥 꼴찌다. 그런데 리더가 바뀌었다. 주인이 바뀐 것이다. 예수님이 리더다. 새사람이 된다. 죄와 사망을 이기는 조가 된다. 옛 사람과 새 사람도 본성이 바뀐 것이 아니라 리더가 바뀐 것이다. 아담과 그리스도, 첫 사람과 마지막 사람이다. 아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옛 사람에 속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새 사람에 속한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은 존재론적이 아니라 관계적 또는 위치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적어도 본성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변화를 말한다. 전자는 우리가 아담 안에 있을 때의 모습, 죄와 사망의 지배에 휘둘리며 사는 옛 시대의 사람이다. 공자는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취한다”라는 뜻의 ‘거고취신(去故取新)’을 말하였다. 주군이 바뀌면 많은 것이 바뀌게 된다. ‘옛’ 것은 버리고 ‘새’ 것만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 자신의 자력이나 의지의 결과가 아니다. 아담 안에 있었던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바랜 것을 버리고 새것을 입을 수 있다. 1995년 3월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에서 ‘불량제품 화형식’을 했다. 150억원이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한 이사는 이렇게 말했다. “제품이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교차했다. 그 불길은 과거와의 단절을 상징했다. 그 불길 속에서 우리는 희망의 불씨를 봤다.” 이 사건이 오늘의 삼성 신화를 만들었다.

새 사람은 예수님과 동일시된다(엡 2:14-16). 예수님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서로 화평하게 된다. 새 사람은 그리스도와 동일시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전의 인종, 계층, 종교적 차이가 없어진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주론적’으로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구축되어진 ‘우주적 인격체’와 ‘공동체인격체(corporate personality)’로 말해진다. 후자는 한 민족이나 사회적 관계를 대변하는 시조, 지도자, 왕 혹은 대변인을 지칭한다. 한 민족의 제 구성원들은 그들을 대변하고 있는 그 사람과의 관계성 때문에 그와 공동인격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옛 사람은 이전의 삶에 속해 있으며(골 3:9), 새 사람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인간 실존이다(골 3:10). 그리하여 신자들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자들이다(엡 4:22-24).

 

2. 하나님께서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으로 살게 하신다

지난 것을 익혀 새로 알아간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 과거의 일을 배워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 등의 성어가 의미하는 것은 기예를 다루는 영역에서 우선 베껴가며 실력을 닦는 의고의 전통이 강하게 배어 있다. 옛 사람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과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것도(엡 4:22 이하; 골 3:9 이하) 죄의 권세에 대한 개인적인 단절이나 싸우는 것으로 이해되어져 왔다. 그러나 옛 사람이 새 사람이 되는 것은 구원의 순서가 아니라 구속사의 면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은 개인의 삶의 전환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아니다. 오히려 한번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고 그리고 그의 백성들이 공동적 의미(coporate sense)에서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나 그 면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 옛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다, 그의 죽으심의 형상과 연합되었다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우리가 직접 죽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고난에 우리가 참예함을 가리킨다. 우리의 계획과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은 우리가 헌 옷을 입고 새 옷으로 갈아 입는 것과 다르다. 마치 갓난아이의 젖은 옷을 벗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히듯 하나님께서 우리를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게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새 사람에서 옛 사람으로 마음대로 돌아갈 수 없다. 퇴행은 대표적인 방어기제이다. 현실의 좌절감이나 스트레스가 클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지나온 발달 단계로 되돌아가는 현상이다. 영적 퇴행을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그가 죄로부터(롬 6:10), 율법으로부터(갈 4:4), 그리고 사망으로부터(롬 5:9; 빌 2:7-8) 해방되었음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죄, 율법, 그리고 사망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이 인류에게 제시하는 대안은 두 가지 뿐이다. 아담이냐 그리스도냐. 사망은 한 사람, 즉 첫 번째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을 죽게 했다(고전 15:21-22). 그러나 종말의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가져 왔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죽었다는 말은 구약에 흔히 나타나는 인간의 연대성 개념을 표현한 것이다. 대표성의 원리이다. 인류의 대표자로서 아담이 범죄 한 것이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죽음으로 몰아넣게 한 것이다.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기 전의 불신자의 본성을 일컫지 않는다. 옛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위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삶 전체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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