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파란 꿈,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이원유 원장 - 연세이원유치과의원원장, 전 연세대 교수, 교정전문의, 워싱턴주립대 교정과 초빙교수, 켄터키대학 구강안면통증센터 초빙교수, 세계치과교정학회, 미국치과교정학회, 구강안면통증학회, 아시아 임플란트학회 회원, 아시아 두개안면장애학회 회원, 대한치과교정학회 정회원, 대한치과이식임플란트학회 회원

사람이 태어나 살다가 병들어 세상을 떠나는 것, 생로병사는 자연의 이치이다. 자연의 이치 치고는 정든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은 커다란 슬픔이다. 며칠 전 어머니는 노환으로 92세에 소천하셨다. 한국인 여성의 평균수명 86세보다 조금 더 사셨지만, 마음속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건강보험공단에 의하면 한국인은 평균적으로 마지막 6~7년 정도는 치매 등으로 시달리다 돌아가신다고 한다. 어머니는 타고나신 건강체질이셨지만 말년을 요양원에서 보내셨다.

1929년생이신 어머니는 3.1 운동 발생 10년 후에 태어나셨다. 일제와 해방, 6.25 전쟁과 4.19, 한국의 근대화 과정을 온몸으로 겪으셨다. 특히 6.25 전쟁 후 모든 것이 피폐할 때 자식들을 낳으셨으니 고생이 말로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연년생의 자식을 낳고 젖이 나오지 않아, 미국 구호 물품인 우유와 치즈를 우리 형제에게 먹이셨다.

6.25 전쟁, 그리고 가난은 사람들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다. 그 당시 길거리나 어디서는 서로 주먹 쥐고 싸우는 것은 흔히 보는 풍경이었다. 내가 중학교에 진학하기 전까지, 시골에서 상경한 친척들로 우리 집은 늘 시끌벅적했다. 어머니는 시골에서 올라온 친척들과 우리 식구를 포함해서 10명이 넘는 대식구를 책임지셨다. 삼촌들 결혼까지 뒷바라지 한 어머니는 철의 여인이셨다.

말년에 어머니는 치매로 아버지가 계셨던 요양원에 머무시게 되었다. 찾아뵐 때마다 쇠약해지는 어머니는 희미한 웃음을 짓곤 하셨지만,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내 고향 남쪽 바다 ‘가고파’를 불러 드리면 마치 지휘하듯 손을 젓고 노래하며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흥에 겨운 어머니는 그 순간만큼은 물새가 날고 동무들이 뛰놀던 고향에서 색동옷을 입고 있었다. 홍조 띤 얼굴, 반짝이는 눈동자에 남해의 파란 물이 어린 채로.

얌전한 치매 환자로 누워 계시게 될 즈음, 그 옛날 곱디고운 김 판사 집 손녀딸이었던 어머니의 마른 손에 한스러운 삶이 서려 있는지 가슴이 뭉클하다. 현대 시를 곧잘 외우시던 문학소녀인 어머니, 유치환의 깃발을 종종 읊으셨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광복 후 통영여고 국어 선생님 셨던 유치환 시인은 문학의 향기로 어머니를 잔잔한 통영 앞바다의 어린 시절로 인도했다. 이제 누가 유치환의 <깃발>과 김상옥의 <옥저>를 어머니처럼 맛깔스럽게 불러줄까.

어머니가 다섯 살 때 호주 선교사가 세운 유치원에서 불렀던 찬송가를 80세가 넘어서도 부르신 것은 아마 푸른 눈의 여자 선교사의 열정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이역만리 몇 달 동안 배를 타고 왔던 선교사의 열정은 어머니의 삶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남에게 항상 친절을 베풀며, 남녀평등, 인내와 감사, 자유와 용서는 어머니의 삶 속에 녹아있다. 자식들에게는 현명한 어머니, 며느리들에게는 존경하는 시어머니, 손주들에게는 사랑하는 할머니셨다.

내가 아플 때 안아주시던 그 품이 그립다. 아직도 푸른 파도처럼 넘실대는 그리움이다. 풍족하지 못해도 언제나 풍요로웠던 어머니. 시인의 마음으로 모두가 아름답고, 평화롭게 살기를 꿈꾸셨던, 그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시스트. 내 마음에도 불기 시작한 바다 내음. 회한의 눈물이 아니다.

많은 성도의 축복 속에 떠나는 어머니. 비록 고비마다 험한 삶을 사셨지만, 어머니는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온몸으로 부딪히며 인내하셨다. 파란 물 그 바닷가에서 색동옷 입은 어린아이처럼 어머니는 언제나 파란 꿈을 꾸었다. 누구나 바다 같은 사랑으로 받아주셨고, 그리고 당신의 삶조차 받아들였다. 애수 깃든 어머니의 눈동자가 말씀하신다. 꿈은 이어가는 것이고, 사랑은 나누고 가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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