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21) 마술(魔術)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D.Min.),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마술은 초자연적 존재들이나 신비한 방법 또는 귀신들의 힘을 빌어서 인간의 능력으로 뛰어난 일을 행하는 기술 또는 술법이다. 마술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흑색 마술과 백색 마술이 있다. 전자는 저주, 주문 또는 자신의 대적의 인형을 만들어 파괴하기, 그리고 악령과의 제휴와 같은 방법들을 통해 악한 결과를 만들어 내려는 시도이다. 종종 마법의 형태를 취한다. 후자는 저주와 주문을 풀고 신비한 세력을 사용하여 자신과 타인의 유익을 추구하는 시도이다. 마술은 마귀 마(魔)와 재주 술(術)로 꾸며져 있다. 마(魔)자는 수행을 방해하는 나쁜 귀신을 일컫는 범어 '魔羅'(마라)를 약칭하는 글자였다. 마술(魔術)은 '마력(魔力)으로써 하는 불가사의한 술법(術法)'을 이른다. 마술은 교묘한 속임수나 재빠른 손재주나 어떤 기만행위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때로는 마술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의 현상들을 인위적으로 교묘하게 처리하는 속임수에 불과하나 경우들도 있다. 한국의 마술사 이은결의 말이다. “마술이란 보는 이의 무의식 속에 가능성을 심어놓는 하나의 씨앗이다. 그러기 위해 눈속임이 필요한 것이다. 눈속임 이상이 되려면 마술사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들어 있어야 한다. 단순히 조작(manipulation) 위주로만 진행되면 금방 한계가 드러난다. 마술사 자신의 작가 의식이 필요하다.”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술수(witchcraft), 즉 마술 또는 마법을 행하는 마녀였다(왕하 9:22). 미가 5:12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복술, 즉 witchcraft(마술이나 마법)을 끊어버려 더 이상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겠다는 말씀을 통해 마술이 이스라엘에 희귀하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므낫세는 여러 가지 악과 함께 유대에 마술을 장려했다(왕하 21:6).

예수의 탄생을 별 관찰을 통해 알고 왕을 경배하기 위해 찾아온 ‘동방박사’에 해당하는 ‘mavgoi’(마고이)라고 한다(마 2:1). ‘마고스’의 원래의 의미는 ‘마술사’ ‘마술’이다. 원래 매대의 한 종족인 Magain을 나타냈던 이 단어는 ‘갈대인인’과 마찬가지로 전문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교에서 사제를 ‘magus’라고 불렸다. ‘마구스’는 ‘도살자’며 ‘요리사’였다. ‘마구스’는 별을 관찰하는 점성술가(占星術家)다. ‘마구스’의 복수형은 ‘Magi’이다.

 

1. 주문처럼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지 말라

바울이 사용한 예수님의 이름이 악귀 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데 능력이 있음이 증명되자, 에베소의 다른 마술사들(exorcists) 역시 그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들 엑소시스트들의 대부분은 유대인들이었다. 고대 사기와 성경에 기술대로 마술은 초자연적인 존재들인 악령들을 통해서 기적들을 행하는 귀신들의 활동을 의미한다.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은 치유와 귀신 쫓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으로 돈벌이라는 하는 유랑 엑소시스트들을 말한다. 이스라엘에서는 이런 자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낼 때 ‘바알세불의 힘으로 하지 않는냐’고 비방을 들을 때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고 반문하시는 것을 통해 유대인 가운데 엑소시스트들이 있었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눅 11:19).

고대 세계에서 악령을 쫓아내기 위해 주문을 외울 때 주술적인 이름들을 사용하는 것은 보편적인 경향이었다. 특히 이러한 관습은 에베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것 같다. 에베소는 마술적인 기술을 배우고 행하는 중심지로 유명했다. 이러한 평판은 ‘에베소의 문자’ 즉 ‘에페시아 그람마타’가 주술과 처방을 담고 있는 문자를 위해서 고대에 흔히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준다. 더욱이 고대에 있어서 유대인 마술사들은 상당한 인정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특별히 효과적인 주문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마술은 신기하지만 신비하지는 않다. 마술은 아무리 신기해도 사람의 상처 하나 고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신기한 것에 홀려 신비한 것을 잊고 행운을 좇느라 행복을 밟고 사는 경우가 많다.

성경에서 마술이 항상 비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비록 신앙과 관련되어 행해지기도 하지만 마술은 참된 신앙의 대적이다. 참된 신앙은 한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경험에 중심을 두고 있다. 하나님의 뜻에 일치된 삶을 살고자 하는 노력을 수반한다. 성경에는 마술사와 믿음의 사람들이 대결한 사례를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파라로의 꿈을 두고 요셉과 이집트의 점술가들의 대결이다(창 41:8, 24). 출애굽기에는 이집트의 마술사들이 초기에 대거 등장한다. 파라오 앞에서 모세가 지팡이를 던졌을 때 뱀으로 바뀌자 파로오는 마술사들을 부른다.

마술사들이 요술로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지만 모세의 뱀에서 잡혀 먹힌다(출 7:11). 이 기사는 그들의 재간을 부리는 요술쟁이였는지 아니면 비술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자들이었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박수와 술객보다 지혜가 10배가 더했다. NIV에서 박수는 마술사들에 해당하는 magicians, 술객은 마법사에 해당하는 enchanter이다. 영어단어에서 ‘마술사’를 의미하는 ‘magician’도 ‘마구스’에서 유래했다. 다니엘 2장에 느부갓네살 왕이 밤에 꿈을 꾸었지만 생각이 나지 않아 ‘박수와 술객과 점쟁이와 갈대아 술사’를 부르지만 알지 못했지만 다니엘이 하나님의 지혜로 그 꿈을 알게 할 뿐만 아니라 해석한다(단 2:2 이하). 신약에서 베드로와 마술사 시몬(행 8:9)이 대결하고, 바울은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방해하는 마술사 엘루마를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라고 책망한다. 신구약 성경에 마술이 널리 유행되었다는 것은 성경에 이와 같은 기록들을 통해 알 수 있다.

베드로와 사마리아 성의 마술사 시몬 사건 :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행8:18~19)

 

2. 복음이 도구주의 방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기를 지극히 꺼린다는 사실은 고대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종종 이것을 주술적인 원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엑소시스트들은 종종 주문을 외우면서 수많은 신들의 이름을 부르곤 했다. 물론 그 이름들 중에는 참된 신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브라카다브라(Abracadabra)’. 판타지 소설 ‘해리 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마법의 주문이다. 고대 히브리어로 ‘말한 대로 이루어지리라’는 뜻이다. 이 말은 히브리어 abra, 즉 ‘이루어지라’와 cadabra, 즉 ‘내가 말한대로’에서 나온 것으로 ‘내가 말한 되로 될지어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다시 왼쪽부터 읽으면 abra cadabra가 된다. 중세에는 열병을 다스리기 위한 주문으로 이것을 사용하였다. 그 뒤에 마술사들이 이것을 마술의 주문으로 사용했는데, 이로 인해서 아브라카다브라가 마법사들의 주문이라고도 알려진다. 마술사들은 신이나 마귀 또는 귀신으로 하여금 자신을 위해 일하도록 시도하거나 또는 영적 세력들이 자신의 뜻을 따르게 하기 위해 어떤 형태의 마술적 관행을 따른다. 선지자나 제사장은 자신을 위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지혜로 일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기에 자신을 위하는 마술사와 다르다. 성경에는 마술의 불법성과 사악성이 폭로되어 있는 것과 똑같이 마술의 실재성과 능력도 분명하게 인정되어 있다. 모세의 지팡이가 뱀이 되었을 때 이집트의 마술사도 그런 마술을 부릴 수 있었다. 모세 앞에서 기적을 행하였을 때. 이집트의 마술사(하루믓밈)은 신비교와 무당술을 배운 제사장들이었다. 이 이집트의 마술사들은 다른 이교 다라들의 사단의 종자들(딤후 3:8)과 똑같이 마술 또는 마법을 행했었다. 바벨론은 특별히 마술업으로 유명했다.

반복되는 언어는 주술처럼 뇌의 잠재의식을 자극해 의식보다 더 큰 힘으로 상상을 현실화한다. ‘입버릇 이론’을 만든 작가이자 뇌과학자 사토 도미오의 설명은 이렇다. “뇌의 대부분은 의식보다 잠재의식이 차지한다. 말은 잠재의식을 자극한다. 인간의 뇌는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상상만으로 운동 효과를 낼 수 있고, 상상만으로 학습 능력을 높일 수 있다.” 프랑스 심리학자 에밀 쿠에도 동조한다.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은 자율 신경계에 자동으로 입력되며 인간의 몸은 입력된 그대로 실현하려 한다.”

주술사들이 주문으로 이교도 신들을 조종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대 마술사들이 바울이 전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조종하려 시도하였다.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하려고 하였다. 예수님의 이름을 에베소 엑소시스트들이 그릇 이용했다는 사실과 밀접한 내용은 파리 소장 마술 파피루스 574번에 나타난다. 3,108째 줄 앞부분에는 ‘내가 네게 히브리인들의 신 예수에 의해 명하노라’는 엄명이 기록되어 있다.

유대인 마술사들은 악귀 들린 자를 고치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되 시험삼아 했다. 믿음으로 한 것이 아니다. 될지 안 될지 찔러 보는 것이다. 그들이 단지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을 시험한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이미 바울이 그런 능력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한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새로운 마술 주문으로 사용하여 어떤 유익을 얻고자 했던 것이고 따라서 그들은 새 방법으로 그들의 마술사업을 기대했을 뿐이다. 플라톤은 대화편 중 하나인 `국가`에서 기게스의 반지 이야기가 있다. 평범한 목동이었던 기게스는 지진으로 갈라진 땅에서 동굴에서 거인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마법의 반지를 빼 가지고 나온다. 한쪽 방향으로 돌리면 낀 사람이 투명인간이 되는 마법의 반지였다. 놀라운 힘을 가지게 된 목동은 이 마법을 어디에 썼을까.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데 썼을까. 아니다. 목동은 왕비와 간통하고, 칸다울레스왕을 암살한 뒤 스스로 리디아의 왕위에 오른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온통 도구주의적 사고가 지배하는 사회를 살아간다. 이익이 되거나 남는 것의 유무가 좋은 활동과 그렇지 않은 활동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모든 일을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도구나 수단으로 생각해 버리는 도구주의적 사고방식은 그 폐해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에베소의 유대 마술사들은 바울이 전하는 예수님의 이름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삼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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