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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거운 인생 』

황상하 기자   기사승인 2019.10.14  07: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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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퀸즈장로교회, 황상하 목사

뉴욕퀸즈장로교회, 황상하 목사

『 즐거운 인생 』

온통 거짓과 왜곡이 판을 치는 세상에 무슨 즐거운 일이 있을까, TV를 켜든 인터넷에 접속하건 신문을 읽든 진실을 접하기가 어렵습니다. 심지어 책을 읽는 것도 조심해야 할 지경입니다. 거짓되거나 과장되거나 왜곡된 정보에 의해 쓰인 책이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 책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기도 하고, 그런 책의 저자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하고,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인기를 누리기까지 합니다. 가짜 박사 학위와 논문 표절 정도는 문젯거리조차 되지 않는 실정입니다. 대학교수의 연구 논문이나 목사의 진정성 있는 설교까지도 순수하게 대하기가 두려워지고 있습니다. 국회의 결정이나 대법원의 판결이나 교단이나 교회의 결정도 믿을 수 없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를 사는 그 어떤 인간도 거짓이나 왜곡된 삶에서 행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만 정직과 진실의 토대에서 추구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어느 시대에서나 정직과 진실을 비껴가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인간의 타락된 본성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이기적 욕망으로 행복을 추구할 때 거짓은 가장 좋은 도구가 됩니다. 왜냐하면 거짓은 가장 쉬운 방법이고 효용성이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짓된 방법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사막에서 신기루를 좇는 거와 같습니다. 어느 시대에서나 인간이 이기적 욕망에 지배를 받고 거짓과 속임수로 행복을 얻으려고 하는 것 때문에 불행의 요인이 되는 수많은 문제들을 발생시키지만 오늘 날은 그 어느 시대보다 그러한 경향이 심각합니다. 

어느 도둑이 담을 넘어 남의 집에 침입하다가 주인에게 들켰습니다. 주인이 깜짝 놀라며 ‘도둑이야!’라고 소리치자 도둑이 정색을 하며 주인에게 ‘안 들어가면 될 거 아니야.’라고 했다는 우스개 이야기가 있는데, 요즘은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키면 이 도둑처럼 ‘안 들어가면 될 거 아니야.’라는 식으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변명할 뿐 아니라 주인이 소리를 질러서 놀랐다고 오히려 화를 내기까지 하는 형국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코미디이면 즐겁지만 서로가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불행하게 합니다. 

도둑들의 삶에도 나름의 보람과 즐거움이 있을 것입니다. 도둑질을 들키지 않고 성공하면 보람과 즐거움이 있을 것이고, 심리학에 의하면 도둑들 중에는 몰래 남의 물건을 훔칠 때의 긴장감을 즐기는 심리를 가진 자들이 있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그런 도둑은 도둑질 하면서 스릴을 즐기고 들키지 않으면 소득까지 얻으니 일거양득입니다. 조국과 그의 가족들, 뿐만 아니라 그와 연루된 이들은 들키지만 않는다면 인생이 희희낙락의 즐거움과 보람이 넘칠 것입니다. 온갖 불법과 부정을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고 조사를 받으면서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입만 열면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하고 있는 것을 보아 들키지만 않는다면 그 무리들은 축제의 파티를 즐길 것이 분명합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면 불안을 느낍니다. 타락된 본성 때문에 거짓말을 하지만 거짓말을 하면 불안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인간은 거짓말을 하면 불안을 느끼는 것이 정상이고, 거짓말을 할 때 양심의 아픔을 느끼는 것은 양심이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남을 속이고 거짓말을 해도 아무런 불안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양심이 병든 사람입니다. 남을 속이고, 거짓말 하고, 사실을 왜곡하고, 온갖 불법과 부정의 방법을 동원하여 즐거운 인생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양심이 병든 사람들입니다.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법의 제재와 사회적 통념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나름의 즐거운 인생을 추구합니다. 추구하는 것이 학문의 성취이든 비즈니스의 성공이든 추구하는 것이 어느 정도 성취되면 즐거움과 보람을 느낍니다. 이 수준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나 또는 자연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선에서 나름의 즐거운 인생을 추구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교회생활이라는 범주에 가두어 관계하고 일상의 삶에서는 완전히 배제해 버립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를 믿는 신앙은 실제로 자신이 추구하는 즐거운 인생과는 무관한 것으로 설정해 둡니다. 하나님을 유용성의 가치관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즐거운 인생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이 배제됩니다. 자신의 즐거운 인생에서 하나님을 배제하는 이들은 결국 다른 사람도 배제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가서 자기 몫의 유산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오해하였습니다. 그 사람의 형이 욕심이 지나쳐서 동생에게 아버지의 유산을 나눠주지 않고 혼자 차지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동생과 나누지 않고 혼자 차지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불의한 일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이니까 당연히 자신의 문제에 개입하여 도와 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요구에 대해 세 가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첫째는 나는 그런 일을 하러 오지 않았다고 하셨고, 둘째는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는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모두 현행 법 상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현행법이 허용하는 테두리 안에서 즐거운 인생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나쁘다고 비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러한 삶의 태도와 수준을 책망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비유로 교훈을 하셨습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라는 말로 비유의 이야기가 시작합니다. 이 부자는 아마도 유산을 많이 받아 본래 부자인 데다가 큰 풍년이 들어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대 기업가가 새로운 아이템의 사업을 성공한 경우일 수가 있고, 또는 경기가 좋아서 대박이 난 경우일수도 있습니다. 이 부자는 더욱 즐거운 인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물이 늘면 머리는 좀 복잡해집니다. 부자는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라고 합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돈이 많아 주체하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즐거운 인생의 행복한 비명입니다.

나는 가끔 나에게 돈이 많다면 무슨 일을 할까를 생각해봅니다. 정직하게 말해서 일단 집을 새 집으로 지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장학재단을 만들어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몸이 병들거나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서 도와주고 싶습니다. 의식주 문제가 심각한 사람들도 도와주고 싶습니다. 이 모두는 몽상입니다. 몽상이 아니라 실제로 돈이 많이 생기면 내가 어떻게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긴 해도 이 부자처럼 생각하게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유익하게 쓰려는 생각보다 명예와 인기를 얻는 것을 계산하고 또는 어느 순간에 주식이나 부동산에 투자하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몽상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면 많은 돈 때문에 정말 중요한 것을 소홀히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또한 몽상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현실에서는 그 또한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즐거운 인생이란 어떤 것일까요? 이 부자처럼 부가 점점 늘어나서 주체하기가 어렵게 되는 것일까요? 좋은 집에 좋은 차에 여유를 가지고 여행도 다니고 구제도 하고 자선사업도 하고 그러는 것일까요? 그런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업에 성공하고 학문에 기여하고 좋은 일에 명성과 인기를 얻는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즐거운 인생을 추구하는 부자에게 사람의 생명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느닷없이 생명에 관해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생명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생명이란 무엇일까요? 우리의 문제는 이 질문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에 대해 관심도 없고, 관심이 없으니 질문도 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으니 대답도 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런 무거운 질문을 하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 고단하다거나, 이미 알만큼은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의 생명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질문하고 설명하고 대답을 요구합니다. 아주 노골적으로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라고 묻기도 합니다. 우리는 생명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알아가야지만 나의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의 토대와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생명에 대한 아무런 생각 없이 사는 것이 바로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자처럼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지는 못하지만 나름 즐거운 인생을 즐기며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삽니다. 우리는  그런 생각이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에 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고 삽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스스로 자위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생명은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일 뿐 아니라 하나님은 나의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풍성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풍성하게 되려면 언제나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를 굳이 설명한다면 인간은 물질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만든 수많은 발명품 중에 인간에게 가장 유익한 것이 수세식 화장실이라고 합니다. 옛날 화장실은 불편하기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화장실은 음식을 먹을 수 있을 만큼 깨끗해졌고 편리해 졌습니다. 그 외에 옷, 집, 음식 등 온갖 편리한 것들이 많아졌습니다. 문명이 온갖 편리를 제공하고 의식주가 풍족해졌지만 그런 것으로 우리의 생명이 풍성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풍요롭게 하려면 하나님의 생명 통치에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어떻게 통치하고 계시는지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통치를 깨닫고 아는 만큼 그 관계가 풍성해 지고 그 관계가 풍성해지면 그것이 곧 영적 생명이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 생명의 풍성함은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지식이 빈약하면 하나님 경험도 빈약하고 하나님 경험이 빈약하면 영적 생명도 빈약합니다. 물리적으로는 아무리 풍성해도 영적으로는 기진한 상태에서 사는 이들이 있고 아예 영적으로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부자처럼 재물이 늘어나는 재미에서 인생의 즐거움을 찾지 말고 하나님을 향하여 예민하게 촉수를 내 밀고 더듬어 하나님과 그분의 뜻과 섭리를 찾는데 애쓰는 것으로부터 즐거운 인생을 경험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 악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시는 하나님 』

창조 세계의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 내에 그 존재 근거를 두고 있지만 창조주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신다는 것은 창조 세계의 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무슨 목적으로 세계를 창조하셨을까요? 이런 의문에 대답을 찾기 위해 철학과 과학은 세계 존재의 필연성에서 회답을 찾으려고 시도해왔습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너무 완전 하시고 너무 풍부 하셔서 자신을 지배 할 수 없고, 자신의 존재가 마치 샘물이 흘러넘치듯이 세계가 그로부터 흘러 나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은 본래 가난하고 공허하고 굶주리고 욕망에 찬 의지를 지닌 분이어서 자신을 충만 시키고 자신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서 세계를 산출 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것이 바로 세계 존재를 필연성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창조 세계에 대한 성경의 설명과 모순되는 것입니다. 세계에 대한 필연성의 설명은 무게 중심이 하나님이 아닌 세계에 있습니다. 즉 세계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계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또한 세계는 하나님보다 나은 존재로서 세계가 넘치거나 부족함 때문에 스스로 불행에 처한 하나님을 구원하고 구제하기 위해 봉사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아주 강력하게 온 세계가 하나님과 그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한다고 선언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자충족적인 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자신의 완전을 위해 그 누구나 또는 어떤 것의 도움을 일체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무슨 행위로도 하나님께 유익을 드릴 수 없고, 인간이 아무리 의로워도 전능자에게 기쁨이 되지 못하며, 인간의 행위가 온전하다고 해도 하나님께 득이 되지 못하며, 또한 인간의 불의가 하나님께 아무 손해도 끼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필연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기쁘신 뜻으로 모든 인간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십니다(행 17:25).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실 때 어떤 충동이나 필연성도 하나님의 존재 안에는 없었습니다. 창조는 완전히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낼지라도 창조가 하나님의 의로부터 설명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누구에게 무엇을 먼저 받으시고 그 대가로 무엇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빚진 것이 없습니다. 또한 창조 세계 안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하심이 들어 왔을지라도, 창조를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추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 밖으로부터의 사랑의 대상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는 오직 하나님의 자유 능력, 영원하심, 기뻐하심, 그의 절대 주권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계의 창조가 비합리적이고 하나님의 변덕스러운 행위에 의해 된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논리와 이해로는 그렇게 보일지라도 우리는 인간 이성의 판단에 따를 것이 아니라 모든 모순 된 것의 종결로서 하나님의 자유 능력에 의존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유 능력에는 그분의 지혜롭고 거룩하신 계획들이 선행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자신들과 의논하여,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의논에 의존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외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라고 하였고, 성경은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을 가르치는데,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 하시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또한 보존 하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피조물들이 창조되었던 목적이 창조 자체 안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목적을 세우는 것이 수단에 선행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가르침을 종합하여 바울은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롬 11:36)고 하였습니다.

만물은 창조에서부터 전 과정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늘을 비롯하여 모든 창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시편 기자가 바라 본 창조 세계는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영향을 받은 세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 세계에는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들어 있어서 그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저주를 받은 땅이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왜곡된 창조 세계일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 막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과 그분의 뜻과 하시는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드러나는 것이지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이 능동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뜻과 하시는 일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은 피조물의 아름다움이나 인간의 탁월함이나 지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누군가의 죄 때문이라고 보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선포한다는 자연은 때때로 인간에게 엄청난 재난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자연재해가 자연현상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연질서 배후에서 통치하시고 섭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어떤 이들에게는 재난이 되기도 하고 어떤 이들에게는 복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그것이 인간에게 복이거나 재앙이거나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나타내고 있다면 하나님이 영광을 얻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친 백성에게 당신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므로 영광을 받으시지만 당신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도 당신이 하신 일임을 알게 하시므로 영광을 얻으시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복이 되는 일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는 일이고 우리에게 화가 되는 일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지 못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떤 일이 나에게 복이 되거나 재앙이 되거나 상관없이 사람들이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알게 되는 것으로 영광을 얻으십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나에게 재앙이 되는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홍해 앞에 당도 했을 때 바로가 마음이 변하여 군대를 인솔하여 추격해 오고 있었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 막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지만 바로의 군대는 바다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다가 몰살하였습니다. 애굽의 바로는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절한 악한 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악한 애굽 왕의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셨다고 하셨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과 모든 창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없는 것을 우리가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깨닫고 그 사실을 인정하고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라면 악한 자에게 심판이 임하는 것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비록 재앙이나 징계가 나에게 임한다고 할지라도 그 일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 일의 옳고 정당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일을 통해 영광을 얻으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자연 재해도 많고 인간의 범죄로 인한 재난도 많습니다. 전쟁과 테러와 불법과 불의와 거짓과 왜곡이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사실과 진리는 찾아보기 힘들고 모든 것은 뒤틀어지고 축소되거나 과장되고 왜곡되고 있습니다. 정치와 경제와 교육도, 뉴스와 지식과 예술도, 법과 윤리와 도덕도, 신앙과 예배와 사랑도 온통 거짓되고 심각하게 왜곡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근본 가치기준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또 그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도 잘 모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무엇을 심사숙고하여 판다하고 받아들인다 해도 그 선택은 잘못된 선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와 같은 수준에서는 동기와 과정이 순수하고 진정성이 있다고 해도 진리를 위할 수 없고 악의 동조자가 되거나 인간 본분의 직무유기 자가 되기 쉽습니다. 우리에게는 비판 하거나 대체할 수 없는 대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신앙은 막무가내식의 저돌적 신앙 태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상식과 질서와 윤리 도덕과 법을 존중하고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고 무엇보다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악인을 인하여도 영광을 얻으시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이들을 통해서도 영광을 얻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나 누구에게도 영광을 빼앗기지 않으시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선한 종들이 되어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는 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은혜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리니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출 14:4,17-18)

황상하 joseph195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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