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MS 소속 알바니아 선교사(대구 동신교회 파송)

고 배정양 선교사와 최홍아 선교사

29년 전에 남편과 결혼했다. 키 174센티, 몸무게 43kg, 두 살 때 아버님을 여의고 4대 독자 무녀독남으로 홀어머니와 단 둘이 봉천동 산 52번지 전세방에서 재산이라곤 전세금으로 가진 160만원이 전부였다. 

중학교 때 폐결핵을 앓았고, 대학교 땐 기흉이 되어 수술하였으며, 군 면제를 받았다. 한성교회 청년부 담당 목사님이신 최홍석 교수님의 권유로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였고, 신대원 2학년 때 건강상 이유로 휴학하였다. 그 때 결혼을 하였는데 결혼 할 당시 건강은 최악이었고 가방을 들 수 있는 힘조차 없었다. 물론 우리 친정집에선 결혼을 반대하는 것이 당연하였다. 당시 대한항공기가 러시아 상공에서 격추을 당하여 많은 희생자가 났을 때 “목숨은 하나님 손에 달린 것이며, 아무리 건강해도 하루 아침에 명을 달리 할 수 있다”면서 어머니를 설득했고 어머닌 못마땅해 하시면서 결혼을 허락했다. 난 정말이지 하나님만을 믿고 결혼했다.

신혼여행에서 남편은 나에게 제안하길 사례금의 50%를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자고 했다.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고 소리치며 우린 크게 다투었다. 그 당시 남편의 사례비는 19만원. 난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신이 100만원을 벌어오면 그 반을 헌금 하겠소”하고 소리쳤다.

그 후 결혼 20여년이 지난 어느 날, 둘이서 기도회를 하며 맘의 생각을 나누는 시간에 남편은 이런 말을 했다. “저런 믿음 없는 여자랑 어떻게 평생을 살까?” 신혼여행 때 그렇게 생각했었다고...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 기억나지 않느냐? 고 물어왔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남편의 사례금이 900유로면 100만원이 넘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평생 동안은 450유로 가지고 못 살겠어요. 1년만 생활비 반을 헌금하면 안 될까요?” 하나님 앞에서 한 서원은 해로울지라도 갚으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하며 비록 홧김에 내 뱉은 말이었지만 그 약속을 지키려고 1년 동안 노력했다.

남편은 작은 일에도 정직하려고 애썼다. 늘 몸이 약하여 집에 들어오면 누워있는 시간이 많았다. 결혼 초 교회에서 배 전도사를 찾았다. 곤하게 잠든 남편을 깨울 수가 없어서 난 그저 쉽게 “안 계신다”고 답했다. 벌떡 일어나더니 “내가 여기 있는데 왜 없다고 말하냐?”며 다음부턴 “거짓말 하지 말아라”고 그야말로 주의를 받았다. 그 다음부턴 우리 식구 모두 그런 류의 거짓말은 할 수 없었다.
남편의 불만은 시간을 많이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늘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 절제된 삶을 살았고, 아플 때 사용할 수 없는 시간을 고려해 몸이 괜찮을 땐 더 알차게 보냈다. 아무리 몸이 아파도 나에게까지도 내색하지 않았다. 난 그가 얼마만큼 아픈 고통을 지니면서 살았는지 솔직히 잘 모른다. 자신이 아프다고 하면 옆에 사람한테도 피해가 된다고 모든 고통을 혼자 삭이곤 했다.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땐 공평하게 대하려고 애썼고, 후원 받으며 사는 삶 동안 비굴하지 않으려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진실로 남이 잘 되는 것을 기뻐하고 축하해 주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시편 말씀을 늘 묵상했고, 성경을 사랑했다.

남편의 가장 최고의 장점은 나에게 있어 나의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감정에 휘둘려서 내가 힘들어 할 때 이성으로 생각 할 수 있도록 들어주고 다독여 주었다. 같은 얘기를 몇 번씩이나 반복해도 늘 새로운 얘기처럼 들어주고 또 들어주고... 나의 맘이 풀릴 때까지 진지하게 들어 주었다.

“당신은 내가 없어도 사역을 더 잘 할 거야” 하면서 늘 격려해 주었다. 내가 어떤 도움을 요청하면 두 말 없이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그는 자신이 아픈 몸이라 늘 나에게 미안해했다. 남자가 해야 할 일들을 내가 하는 것을 보면서 안쓰러워했고 난 남자가 하는 일들을 할 수 없는 남편이 오히려 힘들어 할까 그의 마음을 헤아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내게 한 말은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두 문장 안에 그의 모든 진심이 담겼다. 남들처럼 화려하게 살지는 않았지만 그와 함께 한 동안 행복하게 살았다.

알바니아 딸들이 이런 말을 했었다. “목사님과 사모님의 삶은 평생 그리워하면서 사는 삶”이라고... 알바니아에 계시면 한국의 아들들이... 한국에 계시면 알바니아의 딸들이... 아들과 딸들만이 나의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라 19년을 선교지에 함께한 남편과의 시간들을 추억하면서 살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이제 나의 얘기를 들어 줄 그는 떠났다. “내가 없이도 잘 할 것이라고...” 말 한 그가 나에게 가진 신뢰를 잊지 말고 기억하며 최선을 다 하여야 하겠다. 그가 남겨질 나와 아이들 때문에 애달프게 생각한 것들이 하늘에서 내려다보면서 괜한 고민이라고 생각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남편의 힘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힘이 되시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켜 나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서 풍성한 삶을 살아가고 싶다. 또한, 남편의 심장이었고, 남편의 자존심과 자랑이 된 알바니아 성도들과 함께 끝까지 신실하고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기길 다짐해 본다.

우리 대구동신교회 담임 목사님을 비롯하여 선교위원회와 알지도 못했던 많은 성도님들, 남편의 신대원 82회 동기 목사님들, 우리의 믿음의 동역자들, 후원 교회들, 전 세계 선교사님들 그리고 아이들의 친구들까지..... 모든 분들의 위로와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일일이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함이 마땅합니다만 그러지 못함을 용서하시고 계속해서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기도의 후원이 절실합니다.
1. 최홍아 선교사의 건강을 위해서
2. 오직 말씀과 기도에 집중 할 수 있도록
3. 알바니아 하늘 기쁨 교회가 말씀위에 든든히 서서
영적으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4. 발두쉬크 청소년들이 말씀 안에서 자라가도록
5. 자녀 우림, 재림의 직장과 배우자를 위해서

2016. 10.20.  최홍아

(편집자주) 이 글은 최홍아 선교사가 3년 전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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