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동역이란 하나님이 역사하실 통로가 되어드림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심혈을 기울인 목회지로서 영적 은사가 강한 은혜공동체로 이방교회의 장자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바울이 떠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분열의 영이 교만의 영과 합세하여 교회를 뒤흔들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가 교회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자 그들을 싸잡아 비난하며 영적 강자 그룹으로 그리스도파까지 출현했다. 교회는 분열 직전의 위기에 있었다. 글로에를 통해 교회 형편을 접한 바울은 편지를 써 보냈다. 바울의 톤은 강했으나 그의 경고와 책망과 권면과 교훈은 모두 사랑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바울은 농법으로 동역의 원리를 설명했다. 바울파와 아볼로파가 강세였는지 바울은 둘의 예만 들었다. 고린도교회의 밭에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며 하나님은 자라게 하셨다. 둘은 하나님과 동사한 동역자였다.

모든 목회자는 서로 동역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의 동역관계를 확인해야 한다. 사역자들 간에 동역하면서 삐걱거리는 것은 영적으로 다듬어지기 전에 서둘러 출발했기 때문이다. 동역은 즐겁고 놀라운 경험이다. 바른 동역이 시작되면 은혜의 역사가 풍성해진다. 문제는 동역을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각자가 하나님과의 동역관계를 확립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섞어찌개를 시켜놓고 따로국밥을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동역을 외치지만 동역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동역의 원천이신 성령께서 탄식하시며 사탄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요나단의 경우처럼 동역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일함”이란 뜻으로 깊이 아로새겨야 한다. 동역이란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역사하실 통로가 되어드림이다. 가로막지 말고 길을 트는 것이다.

Saints Peter and Paul (c. 1620, Anonymous/Roman School)

동역의 장애물들

타인과의 협력과 동역은 가능한가? 양보와 섬김의 자세가 확립되어 있지 않다면 동역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동역의 과정에서 온갖 상처와 그로 인한 아픔들이 생겨날 것이기에 그렇다. 다른 이들이 모여 함께 일을 하다보면 복잡한 관계망을 따라 갈등이 지뢰밭처럼 숨겨져 있다. 언제 어디에서 터질지 모른다. 갈등을 제거할 기제를 찾아야 한다, 지뢰탐지기에 해당하는 것이 양보와 인정이다. 좋은 것은 양보하고 웬만하면 상대를 인정하며 접촉점을 가능한 많이 확보해야 한다. 욕심의 끈을 놓지 않으면 사역의 현장에서 그것이 이상 작동하는 순간 간신히 쌓아올린 협력의 탑들이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이다.

개인주의도 한 몫을 한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의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면 공동체의 연합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하나님 앞에 있다는 신전(神前) 의식을 조금이라도 갖는다면 욕심이나 개인주의 따위가 장애 요인이 됨은 상상 불가다. 인간의 뿌리 깊은 욕심은 찰거머리 같아서 동역의 발목을 시도 때도 없이 잡아버린다. 심지어 하나님이 있어도 자신이 앞선다. 욕심에 가려진 거짓 동역이 발작한 것이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던 세례요한을 자처하며 섬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앞장선다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앞서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예비자로서의 세례요한을 함부로 들먹이지 말라! 예비자의 최후는 죽음이다. 죽을 각오가 없다면 왕의 전령 노릇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시력을 확보함이 최우선이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온 천하는 잠잠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끼리 동역이 이루어진다 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그 동역의 결과를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최우선적으로 하나님과 어떤 형태로든 동역을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동역이 관건이다.

 

동역의 사슬

노아의 방주에는 키가 없었지만 하나님이 키를 붙들고 목적지 아라랏으로 향하게 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도 있지만 오늘 교회에는 많은 노들이 장치되어 있다. 선장으로서의 사공은 하나여야겠지만 선원으로서의 사공은 많아야 한다. 사공이 많아야 많은 노를 저을 수 있다. 사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신 분이다. 그분이 작정만 하면 천사 없이, 인간 없이 어떤 일이든지 이루실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과 동역하는 길을 택하셨다. 인간을 믿어주시고 인간에게 거는 기대가 있다는 말이다. 이 하나님을 실망시켜서야 되겠는가! 하나님과 기쁨으로 동역하기 원한다면 하나님이 함께 일하기 원하는 타인의 존재를 긍정하고 그와의 동역에 더욱 적극적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동역을 원한다는 표식이기 때문이다.

삼겹줄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4:12)

성령의 은사나 영적 현상을 성령과 동일시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치유성회가 신자들의 관심을 빼앗는 현상이 걱정스럽다. 은사집회의 이름 아래서 벌어지는 희한한 영적 현상들의 난무는 도에 지나쳤다. 말씀은 언제나 겉치레에 불과하고 소위 능력 행함에만 집중된다. 개중에 성령의 특별하신 현상이 있지만 대부분은 거짓 영들이 벌이는 축제다. 넘어지고 데굴데굴 구르고 거품을 내뿜고 짐승처럼 울부짖고 발길질을 하고 이빨이 황금이나 백금으로 바뀌고 허공에선 금가루가 휘날리고 거룩한 웃음이라며 숨이 넘어갈 정도로 박장대소한다. ‘한방’에 눈멀고 귀먹은 가련한 양떼들이 혹사당한다. 거룩한 영의 거룩함은 대체 어디 있는가?

신실한 동역자들에게 동역의 영을 부어주시는 성령님은 웃음보다 비탄과 탄식에 익숙하다. 솔로몬의 삼겹줄은 동역의 사슬이다. 믿음, 소망, 사랑은 회전판이 되어 사역자들을 하나로 만드는 핵심 가치다. 지체들 간에 동역이 원만히 이루어지면 몸은 건강을 유지한다. 지체 사이에 불협화음이 생기면 병증으로 나타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디도 일행을 파송하며 그들에 관해 은혜로운 추천사를 썼다. 그 가운데서 동일한 주의 영광, 동행하는 자, 나의 동무요 나의 동역자라 하면서 동역자 된 표현을 중복해서 사용했다. 그는 바울의 동역자들 중에서도 발군의 동역자였다.

 

당신은 나의 동무, 나의 동역자!

“동무”라는 말은 원래 훌륭한 단어였다. 어깨동무처럼 어린 시절을 표현할 때 그렇게 다정다감한 말도 드물다. 그런데 사상적 이념을 공고히 하는 표현이 되고부터 이 말의 사용이 경원시되었다. 필자에게는 동무요 동역자인 벗이 있다. 후배까지 벗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5년 이내면 벗이 되기에 충분한 나이다. 동역자 중에서 진을 빼는 이가 있는가? 요주의 인물이다. 기운을 돋우는 자가 있는가? 동무요 동역자다. 조셉 얼라인과 니토쉥은 시대를 뛰어넘은 나의 동무요 동역자다. 호세아와 에스라 역시 나의 동무요 동역자다.

요즈음 한국은 트로트 열풍이 한창이다. 송가인이란 걸출한 미스트롯을 탄생시킨 이후에 나타날 미스터트롯에 대한 관심이 과히 폭발적이다. 방영 6회가 지나면서 순간 최고 시청률이 27%를 웃돌았다. 10년도 더 된 가요 중에 <동반자>가 있다. 연인이나 부부 간의 사랑을 노래한 노랫말로 차라리 ‘반려자’란 표현이 더 걸맞지만 어쨌든 이렇게 시작한다. “당신은 나의 동반자, 영원한 나의 동반자, 내 생애 최고의 선물.......” 동반자는 동일한 목표를 향해 같은 길을 함께 걷는 자로서 동역자로서의 동무에 적용시키고 싶다. 감히 믿건대 누가 무어라 해도 당신은 이 멀고 험한 길에 꾸준히 함께 할 나의 동반자다.

 

언제까지 내려놓아야 하나?

동역의 기본은 자신이 무엇을 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시도록 여지를 만들어드리는 것이다. 내 존재와 삶과 사역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께서 운행하시는 영역이 되게 허용함이다. 얼마나? 온전히, 전부다. 내가 하지 않아야 하나님이 하신다. 내가 움직이면 하나님이 멈추신다.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원리가 무엇인가? 숱한 사람들의 성공실패를 통해 교훈하고자 하시는 바가 과연 어떤 것인가? 하나님의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점이다. 목회가 사람의 일인가? 하나님의 일인가? 하나님의 일이라면 해답은 이미 주어졌다.

그러므로 동역의 으뜸가는 덕성은 순종이요 그 다음이 믿음이다. 목회의 창안자도 하나님이시요 집행자도 하나님이시며 완결자도 하나님이시다. 목회자는 목회의 시종과 그 모든 과정에서 수종을 드는 자다. 자기의가 강하고 자신만만한 성격일수록 하나님의 성령과 자주 충돌한다. 성령을 이길 인간의 고집은 없다. 다윗은 전쟁을 나갈 때마다 여호와 앞에 엎드려 물었다. 목회란 그런 것이다.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만큼 나아가는 것이다. 나아가고 머무름이 한결같고 세우고 허무는 권세가 오직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면서 사역함이다.

『David』, Frederick Leighton(1830-1896), 1865

이용규 선교사의 <내려놓음>이 좋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내려놓지 못한 삶에 불안을 느끼던 마음들이었기에 뜨끔했다. <더 내려놓음>이 나왔다. 내려놓았지만 여전히 떨어지지 않고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는 것이 있다. 찝찝하던 차에 두들겨 맞으니 속이 시원하다. <더 더 내려놓음>이 나와도 마찬가지다. 내려놓음이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욕심을 비우고 교만을 비우고 자기만족을 비우고 난 뒤에 텅 빈 내 마음은 천국이 아니다. 채워야 할 것으로 채움 받지 못하면 여전히 엉뚱한 것들로 채워진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상투적 내려놓음을 그치려면 채움이 이루어져야 한다.

 

내려놓음의 끝은 채움

더 내려놓으면 더 채워야 한다. 완전히 내려놓으면 완전히 채워야 한다. 무엇을 채워야 다시 내려놓는 수고를 덜까? 욕심만이 아니라 의욕도 내려놓아야 한다. 소유만이 아니라 존재도 내려놓아야 한다. 은혜도 내려놓고 축복도 내려놓고 업적도 내려놓고 온갖 좋은 것들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그렇게 깡그리 내려놓고 철저한 ‘빔’을 이루었을 때 주님으로 채워라! 주님만으로 충일케 하라!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말이다! 성령이 내 마음을 지배하고 성령이 내 의식을 통제하며 성령이 내 생각을 주장하며 성령이 내 행동을 제어케 하는 것이다.

아무리 내려놓아도 내려놓음의 끝이 없음은 인간이 욕심에서 자유롭기 어렵다는 실존적 이유 때문이다. “더”를 아무리 덧붙여도 그 제목의 책은 이어질 수 있는 주제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앎으로 인해 일체의 것을 버렸는데 그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차원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베드로사도가 언급했던 신의 성품이다. 사도들이 이루었기에 우리도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으로 이런 삶을 추구하지만 아무리 비우고 벗겨내도 양파껍질처럼 계속 비우고 벗길 것이 여전함은 뼈아픈 현실이다. 반복되는 강조점이지만 결국 영겁의 회귀 같은 내려놓음을 끝내려면 채우는 길밖에 없다. 일종의 ‘밀어내기’ 식이다. 빛이 이르면 어둠이 물러가는 이치와 같다. 내가 예수로 가득 하면 다른 인격이 자리할 틈이 없다. 내가 진리로 채워지면 곁가지의 사이비 진리들이 발호할 수 없다. 내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악령은 호리라도 작동치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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