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165) - 요나서 (4)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헤세드)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욘4:2).

요나서가 사랑의 책인가? 요나서는 하나님의 사랑(헤세드)이 크신 분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사랑이 크셔서 요나에게 앗시리아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사명을 준다(욘1:2). 살펴 본대로 요나는 그 사명을 수행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잔인한 앗시리아를 싫어했다. 그래서 요나는 가라는 곳의 다른 방향으로 갔고 욥바에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 격랑을 맞게 된다. 서 지중해의 어느 곳인 다시스로 가는 길에 풍랑을 만나 선원들이 다 죽게 되었을 때 제비뽑기가 요나에게 걸렸고 그는 편안히 잠을 자다가 선장을 대화를 나누다가 물속에 던져지니 바다가 잔잔하게 되었다.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을 지내다가 토해져서 땅에 이르게 된 이야기를 살펴보았다. 이러한 여정은 우리가 인간적으로 살면서 복음 전도자가 되기 전 상태의 우리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다시 사명을 받고 요나는 니느웨에서 복음 선포를 한다. 광활한 도시를 삼 일 간 돌아다니며 설교를 한다.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욘3:4). 요나가 말씀을 선포하자마자 놀랍게도 사람들은 회개하기 시작하였다. 말씀 선포의 놀라운 성공이 이뤄진 것이다. 이것은 요나가 원한 것이 아니다. 그냥 하나님의 사명대로 말씀만 선포하기만 하려 했는데 그만 영이 무딘 무신론자들인 니느웨 사람들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죽게 되리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영 반대의 결과를 가진 것이다.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 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는데 믿지 않은 바알 아세라 선지자들이 죽은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요나에게는 낭패(狼狽)가 된 것이다. 요나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이 다른 것이었다. 대부분 우리의 설교 스피치가 성공적으로 잘 전달되어 교인들이 감동을 받고 교회가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인데 요나는 아무리 적이라고 하여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멸망하기를 바란 것이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 보다 죽은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욘4:3). 자신이 설교한 후에 원한 결과가 아닌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구원 받는 일이 생기니 당황하며 죽기를 바라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요나는 도시 외곽으로 나가서 초막을 짓고 박 넝쿨이 자라는 것을 보았다. 박 넝쿨이 자라서 햇볕을 가리게 되었다. 그래서 요나는 그 박 넝쿨을 아끼고 좋아하게 된다. 벌레가 박 넝쿨을 갈아 먹자 시들어서 죽게 된다. 또 동풍이 불어 햇볕이 강렬해져서 설상가상(雪上加霜) 요나는 화가 나서 죽기를 바란다. “사는 것 보다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욘4:8). 아이러니하게도 요나는 박넝쿨을 아끼지만 니느웨의 백성, 12만 명의 목숨은 박 넝쿨보다 더 사랑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오늘 우리의 모습과 똑같은 현실이다. 무엇을 아끼며 사랑하며 사는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과 뜻을 읽지 못하고 살아가는가.

이 요나 이야기는 유머 감각으로 간지럽게 하듯 스토리가 전개된다. 하나님이 원하는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는 요나를 그 다른 방향에서 큰 물고기에 들어가게 하고 큰 하품을 하듯 내뿜는 물속에서 요나를 토해내게 한다. 또 요나가 설교하자마자 다 회개를 하고 요나가 원하는 뜻대로 하지 않고 니느웨 백성이 멸망당하지 않는다. 사랑하고 좋아하는 박넝쿨을 반대로 하나님은 벌레를 보내고 동풍(사막 바람, 시로코)을 보내서 시들어 죽게 한다. 유머와 해학이 있는 이 이야기에서 신학적 진리가 담긴 요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사랑, 은혜와 자비를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는 “주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 인애가 크시고 재앙을 내리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구약의 선교교과서가, 왜 요나서 인가를 말해준다. 그래서 우리가 선교사로 나가서 멸망당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돌아오게 하는 사명을 오늘도 우리에게 요나처럼 주시고 계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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